여러분이 작성한 보고서에 본문의 내용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수학 공식 하나를 집어 넣으면 그 보고서를 읽는 독자에게 어떤 인상을 줄 수 있을까요? 꼭 수학 공식이 아니어도 보고서 내용을 요약하여 사칙연산이 포함된 방정식의 형태로 표현한다면 보고서의 신뢰도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예를 들어, 제품의 매력은 제품 자체의 기능성과 제품이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감성으로 결정된다고 말로 표현하면 될 것을 '매력 = 기능성 X 감성적 어필'이라는 방정식으로 나타낸다면 독자가 어떻게 느낄 것 같습니까?





순수수학과 사회과학의 학제간 연구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스웨덴 멜라르라덴 대학의 킴모 에릭손(Kimmo Eriksson)은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수학 공식이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 공식이 들어갈 법 하지 않은 인문학이나 교육학 등의 논문에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수학 공식이 집어 넣을 경우에 사람들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에릭손은 다양한 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200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뽑은 2개의 논문 초록을 읽게 한 다음에 논문의 질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의 논문 초록은 수렵 채집 부족 내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고, 두 번째 논문 초록은 교도소 수감이 백인 구직자와 흑인 구직자의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논문 모두 수학과는 거리가 멀었죠. 참가자 중 절반은 마지막 부분에 'TPP=T0fT0df2fTPdf' 라는 수학 공식이 포함된 초록을 읽었고, 나머지 절반은 수학 공식이 없는 (원래의) 초록을 읽었습니다. 사실 이 공식은 논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참가자들은 아무 의미 없는 수학공식이 포함된 논문을 더 우수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수학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인문학 분야의 전공자들의 편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수학 공식이 있는 논문을 수학 공식이 없는 논문보다 70퍼센트 이상 높게 평가했죠(수학 관련 전공자들고 45퍼센트 이상 높게 평가함). 이는 수학에 관한 스킬이 부족할수록 의미 없는 수학 공식이 추가된 논문의 질을 올바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소위 '수학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수학 공식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일종의 경외감을 선사하는 모양입니다.


에릭손의 실험은 여러분의 보고서가 독자(보통 상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한 트릭 한 가지를 알려 줍니다. 물론 보고서의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수식을 가미하면 안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보고서의 내용을 수학 공식으로 요약하는 것이 보고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일러주죠. 오늘 결재를 맡거나 발표해야 할 여러분의 보고서를 한번 들여다 보고 수학 공식이 가미될 여지가 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밑져야 본전 아닐까요? ^^



(*참고논문)

Kimmo Eriksson(2012), The nonsense math effect, Judgment and Decision Making,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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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행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이 적으면 불행할까요? 여러분은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일에 투여합니다. 가족과 함께 레져 활동에 쓰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 결과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도 정작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의 라라 애크닌(Lara B. Aknin)과 동료 연구자들이 수행한 실험에서 사람들이 수입과 행복과의 관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애크닌은 참가자들에게 현재 1년간 버는 수입에 해당되는 구간에 표시하게 한 후에 "현재 당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애크닌은 10개의 수입 금액을 각각 제시하고서 "이 정도의 금액을 1년에 버는 사람은 얼마나 삶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행복과, 수입이 같은 조건에서 타인이 느낄 것이라고 짐작되는 행복을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였죠.


전반적으로 참가자들은 자신의 수입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답했지만 상관관계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짐작해보라고 하니 수입이 낮을 때의 행복을 실제보다 낮다고 짐작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1년에 1만 달러 밖에 벌지 못할 때의 행복 수준은 5~6점이라고 평가한 반면, 타인이 그 정도를 번다면 행복 수준이 2~3점 밖에 안 된다고 짐작했던 것이죠. 반면 높은 수입 구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측정할 때와 타인의 행복을 짐작할 때의 차이가 아주 작았습니다. 


후속실험에서 애크닌은 "당신이 그 금액을 1년에 벌게 된다면 얼마나 삶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란 질문을 추가로 던졌습니다. 이때도 타인의 행복을 추측하라고 할 때와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수입이 낮을 때의 행복을 실제로 느끼는 행복보다 훨씬 낮게 평가했으니 말입니다.


돈이 적을 때 실제보다 더 불행할 거라고 믿는 이유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과 레져 활동을 즐길 시간을 희생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려는 동기가 강화됩니다. 여기에 장기적인 경기 불황과 일자리 불안까지 겹치고, 돈이면 다 된다는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돈과 행복과의 관계는 더욱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수입이 낮으면 불행해질 거라는 잘못된 믿음이 강화되는 현실입니다.


알다시피 돈은 행복에 필요한 여러 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현재 수입이 낮다고 해서, 향후에 낮은 수입이 예상된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불행으로 치닫게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런 걱정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며 더 많은 양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하는 막연한 압박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더 빠르게'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여러분 자신의 손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곰곰히 따져볼 일입니다. 조직에서 직원들에게 가하는 여러 가지 '성과 채찍질' 또한 두려움에 기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그런 채찍질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 모릅니다.



(*참고논문)

Lara B. Aknin, Michael I. Norton, Elizabeth W. Dunn(2009), From wealth to well-being? Money matters, but less than people think, The Journal of Positive Psychology, Vol.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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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하려면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카락을 잡아뜯으며 고민하지 말고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즐기라고 권합니다. 휴식과 산책을 통해 고민하는 문제를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창의적으로 문제의 해법에 접근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연결'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례로 뉴턴이 산책을 하다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착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사과가 관련됐는지는 여전히 논란이긴 하죠).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 산타 바바라 분교의 벤자민 베어드(Benjamin Baird)는 상식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창의적인 발상을 원한다면 단순히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베어드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어떤 물건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것을 얼마나 많은 용도로 쓸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참가자들 중 한 그룹에게 컴퓨터 모니터 상에 간혹 나타나는 특정 숫자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답하게 하는,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켰습니다. 반면 두 번째 그룹의 참가자들에게는 특정 숫자 이전에 나왔던 숫자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답하게 하는, '기억력이 요구되는 일'을 시켰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에게는 12분 동안 그저 휴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베어드는 이러한 '인큐베이션' 과정을 거친 다음 참가자들에게 다시 두 개의 물건을 알려주고 얼마나 많은 용도를 생각해내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한 참가자들의 창의력 점수가 40퍼센트 넘게 향상되는 모습이 발견되었습니다. 상식과 달리 휴식을 취한 참가자들은 전혀 향상되지 않았고 '기억력이 요구되는 일'을 수행한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에서 잠시 떨어지되 그저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기억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일을 하는 것이 문제 를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휴식보다는 산책이 창의적인 발상에 더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을 옮기며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두뇌에 부담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오감을 통해 다양한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의 방랑(Mind Wandering)'이 창의적인 발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베어드가 아무 생각없이 숫자의 짝홀수 여부를 말하게 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마음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지를 측정하자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보다 그 점수가 높게 나왔다는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베어드가 실험을 통해 권하듯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난 후에 문제를 다시 바라보면 어떨까요? 그저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한번 여러분 자신을 실험해 보기 바랍니다.



(*참고논문)

Benjamin Baird, Jonathan Smallwood, Michael D. Mrazek, Julia W. Y. Kam, Michael S. Franklin, Jonathan W. Schooler(2012), Inspired by Distraction : Mind Wandering Facilitates Creative Incubation, Psychological Science, Vol.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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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에 대한 짧은 생각들   

2012. 11. 6. 10:17


2012년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생각들입니다. 담벼락에 흘러가도록 나뒀다가 저조차 잊어버릴 것 같아 여기에 정리해 둡니다.





[리더십에 대한 짧은 생각]


- 우리는 관리자(팀장, 임원, CEO 등)에게 많은 것을 바란다. 목록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끝이 없다. "우리에겐 그런 관리자가 얼마나 흔한가?"라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그런 관리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관리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수록 오히려 조직문화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 관리자가 되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자신의 일을 부하직원에게 떠넘기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표현은 아닐까?


-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리더십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리더의 역할을 맡기지도 않으면서, 권한이양이나 권한위임도 하지 않으면서.


- 자기계발서들은 왜 한결같이 '리더가 되라'고 말하는가? 왜 우리 모두가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가? 리더십은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재능에 속한다. 음악 못하는 사람에게 음악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리더십을 갖출 능력이 없는 이에게, 리더가 되고 싶지 않은 이에게 리더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 승진은 또 하나의 채용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새로 뽑는다는 관점에서 승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회사에서 승진은 보상의 도구로 쓰인다. 승진이 보상의 방편이 되면 '피터의 법칙'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 함께 진군하는 지휘관보다 멀리서 군대를 지켜보고 있는 장군이 병사들을 전장으로 더 쉽게 보낸다.



[조직문화에 대한 짧은 생각]


- "부하직원"이란 말. 상하적 관계를 강조하는 이 말은 사라져야 한다. 이제부터 "팀원"이라고 불러야 한다.


- 냉소적인 직원들이 많은, 아주 간단한 이유. 경영자가 언행일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소통이 잘 되는 조직에는 갈등이 잦다. 소통이 안되는 조직일수록 조용하다.


- 출퇴근 시간을 개인이 알아서 자유롭게 정하도록 하는 것,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일까? 왜 모두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야 할까? '초연결 시대'에 왜 물리적 장소에 함께 모여 있어야 할까?



[자기계발에 관한 짧은 생각]


- 보고서를 간결하게 핵심만 쓰기 위한 연습. 수첩 한 장에 보고서의 모든 내용을 담아라.


-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룰수록 실천 가능성은 급감한다.


- "효과적인 활동을 했으면 조용히 뒤를 돌아보라. 조용히 뒤돌아보면 훨씬 더 효과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by 피터 드러커


- 회복탄력성(부정적인 감정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서 평온을 찾는 것)을 높이는 한가지 방법. 어떤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기보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간주한다.


- 긍정의 함정. "지나치게 긍정적인 정서는 유방암, 말기 신장질환과 같이 예측이 힘든 질병을 발견하는 데에는 오히려 해롭다.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여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필요한 처방이나 검사를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from <너무 다른 사람들>


- 내일은 '오늘의 태양'이 뜬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현실을 직시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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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들을 살펴보면 여러 키워드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행복'입니다. "행복하려면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행복의 중요성을 호소합니다. 그런 책을 읽어보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미디어나 언론에서도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 국민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며 지속적으로 의견을 내놓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책이나 기사를 접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듭니까? 행복하게 살겠다는 긍정적인 의지가 샘솟아 오릅니까?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현재의 자신이 초라하고 나약하게 느껴집니까?


호주 퀸즐랜드 대학의 브록 배스티언(Brock Bastian)이 이끄는 연구팀은 행복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배스티언은 123명의 참가자(호주인과 동아시아인들이 섞인)들에게 설문을 돌려 '우울함을 느낄 때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생각된다(자기 평가)', '나는 우울함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자신에 대한 기대)', '다른 사람이 날 우울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사회적인 기대)' 등의 질문에 얼마나 동의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가 자신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 참가자일수록 자신들이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우울함이나 슬픔)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바꿔 생각하면, 행복을 강조하는 쪽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될수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을수록 사람들은 '난 슬퍼하면 안돼', '좌절하면 안돼'라면서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려 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자기 자신을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며 비하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오히려 행복하지 못한 상태로 이끄는 것이죠.


배스티언은 후속실험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끼친다'라는 결론을 낸 연구 결과를 참가자들 중 일부에게 읽게 했습니다. 반면, 다른 참가자들은 '부정적인 감정은 잠시 지속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라는 연구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 읽기가 끝나자 배스티언은 참가자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해 과거에 경험한 좋지 않은 사건을 회상하며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현재 감정 상태가 어떤지 측정해 달라고 했죠.


그 결과, '부정적인 감정은 좋지 않다'란 연구 기사를 읽은 참가자들이 '부정적인 감정은 괜찮다'란 기사를 읽은 참가자들에 비해 자신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정적인 감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연구 기사(비료에 관한 연구)를 읽은 대조군들 역시 '부정적인 감정은 좋지 않다'는 기사를 읽은 참가자들만큼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으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행복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라는 식의 사회적인 분위기(혹은 압박)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배스티언의 연구를 종합하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슬픔이나 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는 쪽으로 사회적 인식이나 기준이 편협하게 흘러갈 때 정상적으로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죄악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강조할수록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 행복하라는 말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자기계발서를 가급적 멀리하는 것, 행복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참고논문)

Brock Bastian, Peter Kuppens,Matthew J. Hornsey, Joonha Park, Peter Koval, Yukiko Uchida(2012), Feeling bad about being sad: the role of social expectancies in amplifying negative mood, Emotion,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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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집에서 애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남성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직업 세계에 여성들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지요? 여성들에게 가장 적당한 직업은 요리사, 간호사, 교사일까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정말로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겁니다. 이 블로그의 방문자분들은 훌륭한 양성평등주의자(혹은 페미니스트)일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방금 함정에 걸려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한 후에 누군가가 성(gender)과 관련된 판단 과제를 제시하면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적인 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죠?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할수록 나중에 편견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그럴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이는 베누이 모닌(Benoît Monin)의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모닌은 20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질문 5개를 제시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멘트 회사에서 사업 확장을 위해 신규직원을 뽑는다는 가상의 사례를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례는 지원자가 고객과의 협상력, 공사 감독과 건설회사와의 친화력, 전문 기술 등이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 직원이 적합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죠. 모닌은 참가자들에 남성과 여성 중 누가 이 포지션에 적합할 것 같은지 물었습니다.


5개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임을 강하게 유도 받은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은 참가자(사전에 질문를 제시 받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멘트 회사에 근무할 사람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대답을 더 많이 내놓았습니다. 분명히 여성 차별적이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남성성이 강한 직업에서 여성을 더 많이 배제하려 했던 겁니다.


후속실험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닌은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원하는 지원자 5명의 이력서를 보여주고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는 과제를 참가자들에게 던졌습니다. 지원자들 중에는 유일하게 백인 여성 1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나머지는 모두 백인 남성), 명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누가 봐도 다른 지원자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죠. 이런 조건 하에서 참가자들은 '나는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신호를 받았거나 '나는 여성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닌이 첫 번째 실험에서 제시했던 시멘트 회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참가자들은 이런 조건에 노출되지 않은 참가자들(지원자 5명 모두가 백인 남성이라는 조건을 접한 참가자들)에 비해 여성보다 남성을 더 많이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모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에 대한 편견 상황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을 수행했는데,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음을 사전에 자극 받은 참가자들이 신임 경찰관으로 흑인보다는 백인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렇듯 성, 인종, 정치적 성향 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자극 받고 나면 그 다음에 보이는 판단과 행동이 편견에 빠지고 마는 현상, 간단히 말해 편견이 없다는 자신감이 오히려 편견에 의한 행동을 강화시키는 현상, 이를 심리학에서는 '크레덴셜 효과(Credentials Effect)'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직전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자신하거나 느낄수록 그 다음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적이어도 된다는, 일종의 자격(credentials)을 부여 받는다는 뜻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일을 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도덕적 허용(Moral licensing)'이란 개념과 크레덴셜 효과를 연결하면 평소에 양성평등을 외치던 사람이 엉뚱하게도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하거나 성희롱를 저지르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편견이 없다고 자신하면 오히려 편향된 행동이 강화되는 현상. 인간의 심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합니다. 여성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일수록 알게 모르게 차차 여성 인재(혹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드러날지 모릅니다. 또한 기업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필수로 진행하곤 하는데 크레덴셜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라지 않는 상황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고논문)

Benoît Monin, Dale T. Miller(2001), Moral Credentials and the Expression of Prejudi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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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대의 심리학자인 리차드 펠슨(Richard B. Felson)은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정신병을 앓았던 자, 폭력 전과가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투거나 주먹다짐을 벌였던 경험에 관해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1)  펠슨은 그 상황에서 응답자들이 어떤 조건에 놓였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량적인 분석을 위해 응답자들이 경험한 사건의 상황은 다툼의 심각성 수준에 따라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화가 났지만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때', 둘째 '말싸움을 벌였던 때', 셋째 '주먹이 오고갔지만 무기는 쓰지 않았던 때, 넷째 '무기를 사용했던 때'로 나뉘었죠.


펠슨은 응답자들에게 던진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동성끼리 다툼을 벌일 경우 단 둘이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볼 때 주먹다짐으로 번질 확률이 2배나 높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반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보통 여러 사람들 앞에 있을 때는 다툼이 생기더라도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참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훼손된 자신의 평판이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된다는 위협을 감지하게 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신경 쓰고 염려하는 인간은 평판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불릴 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감행하는 폭력은 상대방으로부터 손상된 평판을 회복시키기 위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똑같이 모욕스러운 말도 단 둘이 있을 때는 말타툼으로 끝나겠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거나 설령 폭력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분노의 강도는 훨씬 높을 수밖에 없죠. 실제로 미국에서는 폭력적 싸움의 3분의 2 가량이 공공장소에서 벌어지고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4분의 3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펠슨의 연구는 부하직원의 잘못을 혼내고자 하는 상사에게 한 가지 귀중한 주의사항을 전해 줍니다. 바로 '절대로 다른 직원들 앞에서 혼내지 마라.'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직원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서 혼내는 상사에게 주먹을 날리는 하극상의 상황을 연출하기는 어렵겠죠. 그렇게 하면 상사로부터 깎인 평판이 '상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놈'이라고 동료직원들에게 각인되어 더 깎일 테니 말입니다. 이보다는, 혼내는 목적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함이든 아니면 욱하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함이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혼내는 행위는 부하직원으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기는커녕 반항심과 분노를 극도로 상승시킨다는 게 문제입니다. 비록 잘못을 인정하고 싶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 때문에 자기합리화와 자기방어의 프로세스가 더욱 강화되어 급기야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거나 부정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으로부터 찾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심리학자 마크 리어리(Mark Leary)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가치, 선행과 악행을 관찰하여 자존감을 형성하고 평판을 높이려고 시도한다고 말합니다.2)  타인이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반대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거부 의견을 밝히면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를 통해 규명한 바 있죠. 여러 사람 앞에서 혼내는 행위는 짧은 시간에 자존감을 한꺼번에 깎아내리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물론 기대하는 행동의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죠.


부하직원을 혼낼 일이 있으면 조용한 장소에서 단 둘이 만나야 합니다(동료 간의 다툼도 마찬가지).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듣는 곳에서 야단을 쳐야 부하직원이 더 분발할 거라고 믿는 자(또 그렇게 행동하는 자)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모르기에 유능한 관리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여러 사람 앞에서 야단을 맞는 부하직원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역지사지하면 바로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혹여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부하직원을 망심 주듯이 혼낸 적이 있다면 그를 조용히 불러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으로 인해 깎여내려간 그의 자존감을 다시 채워주는 일은 관리자의 책무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Richard B. Felson(1982), Impression Management and the Escalation of Aggression and Violence, Social Psychology Quarterly, Vol. 45(4)

2) 존 휘트필드, <무엇이 우리의 관계를 조종하는가>, 김수안 역, 생각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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