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는 상사의 성격을 닮는다   

2011. 5. 17. 09:40



옛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란 말이죠. 즉,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그사람을 닮게 되니 조심하라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이 말은 기업이라는 조직에서도 통합니다. 성질이 못되고 다혈질적인(게다가 비열하기까지 한) 상사를 만나면 부하직원들은 대개 그를 싫어하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상사의 위치에 오르면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근묵자흑이란 말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자인 노스웨스턴 대학의 리 톰슨(Leigh Thomson)과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카메론 앤더슨(Cameron Anderson)이 조직에서의 '근묵자흑 원리'를 실험으로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경영대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을 3명씩 팀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경영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관리자 회의'를 진행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업에서 어떻게 경영자원의 배분을 의사결정하는지 배우기 위한 목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톰슨과 앤더슨은 3명 중 한 명에게 '큰 회사의 최고 경영자' 역할을 맡겼고, 다른 두 명의 학생들에게는 각각 중간 레벨의 관리자와 낮은 레벨의 관리자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면, 학생들에게 각각 사장, 부장, 과장의 역할을 맡겼다고 보면 되겠네요. 이렇게 역할을 부여하고 학생들에게 경영자원 배분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라고 했더니, 예상대로 사장 역할을 맡은 학생이 회의를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흥미로운 현상은 No. 2인 '부장'에게서 발견되었죠. 부장(역할을 맡은 학생)이 사장의 행동과 말투를 닮아가는 모습이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특히 회의를 주관하는 사장이 에너지가 넘치고 공격적이면서 비열하기까지 한 '골목대장'일 경우에 시간이 지날수록 부장은 사장의 언행을 따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부장 역할을 한 학생의 성격이 원래 약자를 괴롭히는 걸 좋아해서일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실험을 실행하기 전에 톰슨과 앤더슨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성격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본래 감정을 잘 억제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을 지닌 학생들이 실험에서 부장 역할을 맡으면 사장의 못된 언행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발견됐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들(부장 역할의 학생들)은 경영자원을 배분할 때 금액의 크기에 많이 집착하고 과장 역할을 하는 학생들의 말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근묵자흑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실험이죠.

반대로 사장 역할을 한 학생이 온화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지만 꽃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부장은 그런 사장의 성격에 동화된다는 것을 톰슨과 앤더슨은 또한 발견했습니다. 부장 역할을 한 학생의 본래 성격이 공격적이고 다혈질이라고 해도 사장의 온화함이 그런 성격을 중화시켰던 겁니다. 그렇다면 No. 3인 과장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요? 그들은 (이 실험에서는) '쫄병'이기 때문에 수동적이겠죠. 따라서 그들은 사장과 부장의 언행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조직의 분위기에 따라 행동할 겁니다. 만일 그들(과장 역할의 학생)에게 부하직원이 주어졌다면, 짐작컨대 그들 역시 사장과 부장의 언행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였을 테죠.

이처럼 조직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이 드러내는 언행 스타일이 조직 전체에 빠르게 전염됩니다. 이를 '정서적 전염'이라고 부릅니다. 상사가 폭군 스타일이고 다혈질이면 부하직원도 화를 잘내고, 상사가 온화한 덕장이라면 부하직원들 역시 그러합니다. 이런 정서적 전염의 강도는 매우 강해서 실권을 지니지 못한 직원 1명이 조직의 분위기를 좋은 쪽으로(혹은 나쁜 쪽으로)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조직 분위기에 금세 동화되고 적응하죠.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면 누구나 조직문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조직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 중에 가장 강력하면서도 필수적인 것은 리더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격적이고 상명하달 식의 일방적 소통을 좋아하는 리더가 직원들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을 꿈꾸는 일과 같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과 실천은 쏙 뺀 채 '부하직원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조직문화가 이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리더가 있다면 자신의 무지를 공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서적 전염을 잘 활용하면 조직문화를 바람직하게 변화시킬 목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제도나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리더 스스로 원하는 방향대로 변하고 실천하면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지듯이 조직 전체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테니 말입니다.

직원들을 검게 물들이지 않으려면 리더 스스로 검은 때를 벗어야 합니다. 그게 조직문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리더의 덕목이자 중용입니다. 근본적인 것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껍데기만 바꾸려는 태도는 중용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외도입니다.

(*참고문헌 : Fear in the workplace : The bullying Boss)
(*참고도서 : '또라이 제로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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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다. 부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다들 자신들의 자식만큼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희망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도 자신들이 단어의 본뜻도 모른 채 욕을 생활화(?)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자유에 의해 이와 같이 명랑발랄한(?) 욕설 문화를 부흥 발전시킨 걸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언명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생명체임을 선포하는 문장이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판단하며 자유롭게 결정할 줄 아는 능력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강력하며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의지가 진짜 지유의지가 맞는 걸까? 그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나는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다.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메뉴판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나의 선택을 하나씩 따져보면 외부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모방하는 뇌 속의 '거울 뉴런(Mirror Neuron)', 다수의 힘에 따르는 논리, 어딘가에서 무심코 들은 말 한마디의 위력, 은근하고 치밀한 광고 메시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들의 음모 등이 우리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진짜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블로그라는 한계로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기 곤란한 점 양해를....)

"난 쌀국수를 먹겠어" 라고 내린 결정이 과연 내 자아의 자유로운 선택일까? 난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에겐 자유의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뇌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복잡해지고 고도의 기능을 갖추게 되면서 부산물로 얻어진 것이다. 뇌 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의사결정은 사회문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내린 결정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사실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으니, 그를 처벌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그로 하여금 범죄를 행하도록 만들었으니 처벌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혹은 제도, 문화 등등)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벌이 아니라 상을 줄 때도 마찬가지다.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어야 하며, 더 나아가 자유의지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비판을 가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주객의 전도된 논리이다. 마치 코가 안경을 걸치기 위해서 진화돼 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인간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수많은 경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인가, 라고 말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그점에 대해 아직 모르겠다. 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반면에,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옳은 방향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려는 의지, 즉 '정향(定向)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향의지란 판단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주변 상황을 관찰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문화적 요소 중에서 무엇에 높은 비중과 가치를 주느냐에 관한 판단을 말한다. 비록 의사결정의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없지만, 자신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외부요소를 어느 정도 필터링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존재한다고 본다.

물론 정향의지가 잘못 작동되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벨 커브(bell curve)의 양극단의 사건들이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사회문화적 규약을 대개 준수하려는 건전한 정향의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부재하지만 정향의지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옳은 것만 보고 느끼고 경험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야 본인의 의사결정을 사회문화적 규약에 부합시킬 수 있으며, 개인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향의지를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을 경계하라고 했듯이, 인간의 사고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 간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내뱉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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