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저녁에 차를 타고 가다가 무료하여 라디오를 켰습니다. 97.3 MHz에서 그때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열린 토론'이었습니다. 중간부터 들은지라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신분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오고 가는 이야기를 잠깐 들으니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 관하여 각 당의 입장을 정리하여 말하는 자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안철수 원장에 대한 언급을 하더군요. 워낙 이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인지라 그가 안철수 원장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는 논리를 듣고 실소를 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KBS 홈페이지 들어가니 그날 나눴던 토론 전문이 올라가 있더군요. 그 부분을 복사하여 아래에 옮겨 봅니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철수 교수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에서 시민들이 상식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사실상 상식이 비상식을 이겼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도 과학자답지 못한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상당히 국민들을 선거결과를 놓고 갈등과 분열로 놓고 가는 잘못된 선동적 분석이다 이렇게 판단합니다.

만약에 나경원 후보 쪽이 비상식이었다면 나경원 후보고 지지한 46%라든가 또는 50대, 60대에서는 나경원 후보가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지지를 받았는데 50대, 60대의 우리 한국사회의 중견이나 원로급들은 전부 다 비상식이라는 것인지, 젊은이들은 상식이고 중견 원로층은 비상식이라고 하면 한국사회가 물구나무 사회라는 것인지 안철수 교수는 대단히 선거결과를 너무 자극적이고 정치적이고 선동적으로 해석한 것 아니냐 이렇게 판단합니다.

(*출처 : http://www.kbs.co.kr/radio/1radio/kbsopen/interview/index.html ) 2011.10.31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진짜로 안철수 원장의 논리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저는 김진 위원의 발언을 듣고 비논리적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김진 위원의 논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적인 후보(즉 비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비상식적인 시민이다.
어떤 사람이 상식적인 후보(즉 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상식적인 시민이다.



이런 논리로 안철수 원장의 발언이 선동적이라고 김진 위원은 주장하지요. 그러나 그의 논리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비상식적일까요?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걸까요?

진짜로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섞여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반대로, 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도 역시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비율은 잘 모르겠지만) 섞여 있겠죠. 게다가 인간의 특성을 잘 안다면, 인간은 상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비상식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논설위원인 김진 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진 위원은 안철수 원장이 50~60대 시민들을 비상식적인 사람들로 인식하케끔 선동적인 해석을 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시민들을 상식이니 비상식이니 하며 흑백논리적으로 갈라 놓고 생각하는 사람은 김진 위원 자신이 아닐까요? 제 생각에는, 후보자(그리고 정당)는 선거에 임하는 시민들을 기본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들을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을 거라면 후보자들은 굳이 TV 연설을 하거나 선거 유세를 하며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상식에 손을 들어줬다'는 안철수 원장의 말은 가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시민들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판단했다는 고마움의 말로 해석해야 합니다. 비논리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상식적이니 비상식적이니 하는 구분자로 시민들을 나누며 선동하는 사람은 안 원장이 아니라 오히려 김 위원 자신입니다.

김진 위원의 비판은 언뜻 들으면 옳은 말 같아서 청취자들, 나아가 시민과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공산이 크지 않을까요? TV나 언론매체에서 나오는 소위 논객들의 말 속에도 얼마나 많은 논리적 오류가 숨어있는지를 안다면, 그들의 말을 글자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라는 체를 통해 거르고 또 걸러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게 상식적인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일 겁니다.


(* 본 글은 저의 정치적인 입장과 무관합니다.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 검색해보니, 김진 위원이 자신의 신문에 올린 논평 기사가 눈에 띄는군요. '안철수의 선동 바이러스'란 글입니다. 읽고 판단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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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2010. 12. 10. 09:00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자신이 기적을 경험했노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영험한 빛이 내 머리 위에서 잠시 떠도는 것을 보았소. 이는 신께서 내 간절한 기도에 응답했다는 뜻이라오.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는 마치 그 기적이 다시 일어나기나 한 듯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기적을 목격했을 때의 두려움, 애절함, 환희, 경외감 등 감정의 파노라마를 펼쳐냅니다. 그리고 신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감사의 기도로 마무리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말하는 기적을 믿어야 할까요?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오래 전에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말한 바 있습니다. '기적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서죠. 요컨대 그는 '기적을 평가하는 방법'을 주장함으로써 당시에 꽤 분분했던 신학적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흄은 기적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적이란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현상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자연법칙를 깨뜨리는 '이상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란 자연법칙과는 달리 물체가 아무런 장치없이 스스로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을 때를 기적이라 부를 수 있죠.

흄은 "기적을 믿어야 할까?"란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보다, 그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더 기적에 가까워야만 그 기적을 믿을 수 있다." 말이 좀 어렵지만 상당히 명쾌한 판단법입니다.

그의 판단법을 풀어써보면 이렇습니다.

주장 : A라는 기적을 경험했다
주장이 옳으려면 : 
        당신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더 기적적이어야 한다
    =  당신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야 한다
    =  당신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게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일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났다'라는 기적을 주장한다면, 흄의 논리에 따라 다음과 같아야 그의 주장을 믿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개를 해보면, 이 기적은 믿을 수 없습니다.

주장 :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난 것을 봤다
주장이 옳으려면 : 
       당신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더 기적적이어야 한다
    = 당신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야 한다
    = 당신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게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주장이 거짓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난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경험이 훨씬 빈번하고 일반적이다. 

당신이 잘못 봤거나 일부러 나를 속이려는 가능성보다 당신의 주장이 맞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따라서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났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기적에 대한 흄의 판단 방법을 '흄의 원리(Hume's Maxim)'이라고 부릅니다. 흄의 원리는 기적에 대한 평가에 사용되어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지만, 그것을 일반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판단할 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이 처음 들어본 것이거나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질 때 흄의 원리가 좋은 판단 기준이 됩니다. 

다음과 같이 흄의 원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사용되는 비판적 사고의 도구가 됩니다.

주장 : A라고 생각한다
주장이 옳으려면 : A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거짓일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아주 환상적이고 경이로우며 참신하게 보이는 주장을 여러 가지 현란한(?) 근거를 내세워 동의를 구할 때(혹은 강요할 때), 그 근거가 과연 참일지를 고민하기보다는, 그 근거가 거짓일 가능성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입증보다는 반증(反證)이 더 효과적이죠. 근거 중의 하나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 그 근거가 뒷받침하는 그 사람의 주장 역시 거짓이라고 즉각 판단을 내리면 되니까 말입니다. 입증에 초점을 두면 아마도 입증하기가 힘들고 귀찮아서 그의 주장을 편의상 믿어버리거나, 혹은 그가 그런 주장을 하거나 말거나 방치하고 말 겁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근거 없는 '요상한' 주장들이 득세하고 맙니다. 입증의 책임은 주장한 사람이 져야 하는데, 여러분이 입증 책임을 떠안을 이유가 없습니다.

권위자의 말, 언론의 보도, 정보를 가장한 광고 등으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을 때 '흄의 원리'가 여러분의 주관을 지켜주는 튼튼한 방패가 될 겁니다. 황당한 기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데에 꼭 활용하기 바랍니다.

덧글 : 밝게 빛나는 것이 나타나고 물이 갈라지는 현상만이 기적일까요?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이 세계 자체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기적입니다. (본 포스팅을 종교적인 논쟁거리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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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몸에 좋은 경영의 비타민'에 새로운 에피소드가 업데이트됐습니다.

- 제목 : 지름신의 논리에 속지 마세요
- 카테고리 : 자기계발

오늘은 논리의 타당성과 건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논리라고 얘기하면 겁부터 집어먹는 경우가 많은데요, 어렵다고 회피한다면 남들에게 속아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논리에 대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애플 아이튠즈에서 보기 (이 방법을 가장 추천합니다)

YouTube(유투브)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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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약일까, 독일까?   

2010. 9. 1. 09:00

요즘은 좀 잠잠한 듯 한데, 한때 자기계발서의 열풍이 불던 때가 있었죠. 우화나 소설 형식의 자기계발서도 여러 출판사에서 쏟아져 나왔었지요. 아마도 그 중 몇 권쯤은 여러분의 책꽂이에 꽂혀있을 겁니다.

자기계발서의 '현대적인' 원조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쓴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일 겁니다. 그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요즘의 자기계발서들은 프랭클린이 말한 33가지의 덕목들을 확대 재생산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을 물들이는 노을)


프랭클린 시대 이후로 자기계발서가 이렇게 붐을 이루고 앞으로도 끝없이 출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육이 필요한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계발서가 사람들의 자기계발에 실패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사람들은 책꽂이에 꽂힌 예전의 책을 잊고 새로운 자기계발서를 찾아 서점으로 나섭니다. 자기계발서들의 공통적인 논리(혹은 주제)가 아래와 같이 10가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고도 말입니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1: 성공하려면 성공하면 된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2: 꿈꾸면,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3: 고난과 시련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4: 좌절하고 포기하면 인생의 루저가 된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5: 멈추면 퇴보한다. 이 세상은 붉은여왕이 다스리니까.

자기계발서의 논리 6: 열심히 하면 안 될 리 없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7: 모든 것은 당신이 하기에 달렸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8: 성공한 사람들을 본받으면 당신도 성공한다.

자기계발서의 논리 9: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자기계발서의 논리 10 : 도움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먼저 구하라.

사람들이 끝없이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계발서를 읽음으로써 '자기계발되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적어도 그 책을 읽는 동안엔 현실의 신고(辛苦)를 잊을 수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나도 할 수 있어'란 자극을 계속해서 원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자기계발서를 채운 스토리들이 그저 읽기 쉽고 재미를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누군가가 '자기계발서는 독'이라고 힐난합니다. 자기계발서가 헛된 꿈과 희망을 주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난 아무래도 안 되나봐'란 큰 좌절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라 하더군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을 실천하는 것과 혼동하여 '난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어'란 착각과 최면효과에 빠지게도 만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전 '자기계발서는 자양강장제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 땐 자신감과 희망에 부풀어 오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지니 말입니다. 오래 복용하면 몸에 좋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진정한 보약'은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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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오류'에 빠지지 마세요   

2010. 5. 12. 13:17

‘베토벤의 오류’라는 말을 아십니까? 베토벤의 장엄하고 웅장한 음악을 들으면, 그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더러운 옷이 굴러 다니는 돼지우리 같은 아파트에서 위대한 음악을 창조하는 장면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아파트를 목격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음악만을 듣고 그가 훌륭한 저택의 정갈한 작업 환경 속에서 명작을 탄생시켰다고 미루어 짐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토벤의 오류란, 사람들이 과정과 결과가 서로 비슷하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꼬집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뭔가 있을 거야"라고 단정 짓는 '습관'을 말합니다.

(베토벤이 아니라 모짜르트가 사용했다는 쳄발로)


어떤 기업이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할 때 으레 그곳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리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베토벤의 오류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패턴 찾기에 유능한 동물이라서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는 있는 평범한 것이 그 회사의 성공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고 예외적이며 특이하게 보이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발생한 성공을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because of) 발생한 성공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요.

베토벤의 오류가 심화되면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뭔가 있을 거야, 란 시각으로 바라보면 뭐든지 '뭔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의 더러운 작업환경이었다고 잘못 주장하게 되죠. 이를 논리학에서는 '가짜 원인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구글과 같이 성공적인 기업은 직원의 복리후생에 많이 투자하는데, 이를 보고서 복리후생이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강력한 해결책이라고 일반화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특히 복리후생과 관련한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지요. "자 봐라, 구글이 잘 나가는 이유가 바로 복리후생이다"라고 말하며 '가짜 원인의 오류'의 포로가 되죠.

모 CEO는 미국의 기업이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게 된 원인이 성과에 대해 철저히 차별적으로 보상했기 때문이라고 믿더군요. 문제는 그가 프로야구식 연봉 차등을 기업의 유일한 성공요소로 일반화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짜 원인의 오류에 빠지는 사람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와 전세계 PC 운영체계를 장악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모두 낙제생이니 훌륭한 CEO가 되려면 낙제생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베토벤의 오류와 가짜 원인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현상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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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은 거라굽쇼?   

2010. 2. 11. 02:00

우리는 흔히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논리에 수긍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논리는 좋기 때문입니다. 

서두부터 말이 좀 이상하죠? 여러분이 이상하게 느끼는 이유는 문장에서 (좀 어려운 말이긴 한데) '논점 선취의 오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은 눈으로만 봅시다



다음과 같은 형식이 논점 선취의 오류에 해당합니다.

  A는 B이다. 왜냐하면 A는 B이기 때문이다.

척 봐도 엉뚱한 논리죠? 논점 선취의 오류란 말이 좀 어렵다면 '순환 논리의 오류'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논점 회피'의 일종인데요, 결과를 결과 자체로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논증을 시도하려는 오류이죠. 

저는 이런 어려운 논리 용어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오류라는 쉬운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말은 논점 선취와 순환 논리의 단적인 예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이렇게 사용할 겁니다.

 그 사람과 화해해라.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

이 말은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겠죠.

 그 사람과 화해하는 일은 좋은 거다. 왜냐하면 그와 화해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논점 선취의 오류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되죠? '좋은' 이유를 '좋기' 때문이라는 말로 반복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논리가 바로 논점 선취의 오류(좋은 게 좋은 거다 오류)입니다.

'에이, 이런 오류가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나?'란 생각이 들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짧은 문장에서는 쉽게 '좋은 게 좋은 거다 오류'를 발견하여 반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긴 문장이나 교묘하게 '장식한' 문장에서는 찾기가 어렵고 깜빡 속아 넘어가곤 합니다.

다음 문장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교사에게 체벌을 허용하는 것은 학생의 품행을 바로잡는 데 매우 이롭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잘못된 행동이나 자세를 보일 때마다 교사들이 체벌로써 이를 바로잡는다면 학생의 인성 발달과 사회화에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품행을 바로잡는 데 이롭다'와 '인성 발달과 사회화에 크게 도움이 된다'란 말을 잘 보십시오. 완전히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비슷한 표현이죠. 교묘하게 포장해서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결론을 반복함으로써 논점을 회피하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오류'입니다.

이번엔 다음의 문장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TV나 신문에서 만난 적이 있을 겁니다.

 4대강 사업은 법적으로 정당하다. 왜냐하면 4대강 사업은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상당히 교묘하게 '좋은 게 좋은 거다'식의 논리를 사용해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합니다. '법적으로 정당하다'란 말과 '국회를 통과했다'란 말은 사실 동일한 문구입니다. 순환 논리이자 논점 선취의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잘 살펴보면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말을 확대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도 발견됩니다. '법적으로 정당하다'란 문장에서 '정당하다'란 말을 은근하게 강조함으로써 4대강 사업이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정당하다란 의미로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일반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4대강 사업은 정당한 사업이야'라고 생각을 굳히지 않을까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난리야? 정당한 사업인데 말이야'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참 교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운 말입니다. 

여러분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좋은 게 좋은 거다 오류'를 주변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오류가 제법 설득력을 지니는 경우도 간혹 볼 겁니다. 오늘부터는 그런 오류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명확하게 오류를 지적하기 바랍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굽쇼?" 라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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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은 홀수야. 아빤 그것도 몰라?   

2010. 1. 25. 10:17

어제 아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아빠, 0은 짝수야, 홀수야?"

아들이 요새 수학에 흥미를 느끼는지라 더하기, 빼기 같은 사칙연산을 곧잘 합니다. Pop Math 라는 앱은 계산식과 답을 짝지워서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인데, 아들이 애용하는 아이템이 되어 제 아이폰에 저장돼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질문을 엉겹결에 받으니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순간 막막하더군요. 알다시피, 수학자들이 정해 놓은 '짝수'의 정의는 "2로 나누어 떨어지는 정수"입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0은 당연히 짝수입니다. 말은 쉬워도 이것을 이제 만 6살된 아이에게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더군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0은 사람들이 짝수라고 정해 놓았어."

이렇게 옹색한 답변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저의 형편없는 대답을 반박하는 아이의 논리를 듣고 나니 가볍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자신의 논리를 폈습니다.

     "0 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외롭잖아. 외로운 건 혼자라서 그래.
      그러니까 0은 홀수지. 아빤 그것도 몰라?"

이 논리의 주인공


아이의 대답은 당연히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며' 앞에서 언급하더니 뒤에서는 '혼자라서(혼자 있어서)'고 말한 까닭에 0 이 홀수인 이유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링크해 주신 위키 자료를 보니까 0 이 짝수라는 주장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허나, 이 글은 0 이 짝수냐, 홀수냐를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니 논증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이의 대답에 놀란 이유는 논리를 넘어서는 감수성 때문이었습니다. 저 같은 어른들은 "짝수는 2n이고, n은 정수다"라는 무미건조한 수학 정의를 통해 0을 이해하죠. 하지만, 아이는 0 이란 숫자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통해 0 과 '교감'했던 겁니다. 교감하지 않고서는 그런 대답이 나올 수 없겠죠.

아이의 현답(?)을 듣고 나니 어른이 되는 일은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것을 잃는 과정이라 생각해 봅니다. 종이 위에 찍힌 동그란 얼룩을 어른들에게 보여주고 "이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 "점"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아빠의 헝클어진 머리 모양. 내가 어제 먹다 버린 과자 부스러기..." 등 다양한 대답이 쏟아진답니다. 나이가 들수록 답변의 길이가 극적으로 짧아지죠.

세상을 살면서 논리가 앞서야 할 때도 분명 있지만, 지나치게 그쪽으로만 경도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아이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으로 공감하고 교감하려는 노력이면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도 종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아빤 그것도 몰라?" 

맞습니다.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은 아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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