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쥐는 왜 꼼짝하지 않을까?   

2011. 12. 16. 11:40



여기에 쥐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쥐를 길다랗고 좁은 길 위의 한쪽 끝에 놓습니다. 쥐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길은 바닥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길의 반대편 끝에 먹이를 놓아 둡니다(아래의 그림 참조). 

A --------------------------- B
(쥐)                                        (먹이)

그러면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그 쥐는 좁은 길을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길 끝에 있는 먹이를 취하겠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보통의 쥐는 특이한 조건(배가 엄청나게 부르거나 아프거나)이 아니라면 대개 그렇게 행동합니다. 

헌데, 실험조건을 아래와 같이 조금 바꿔 보면 쥐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A --------------------------- B
(쥐)                                     (전기충격)

먹이가 위치했던 곳에 전기충격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쥐는 멋도 모르고 좁은 길을 달려가다가 B 위치에서 강한 전기충격을 느끼겠죠.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불쾌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겁니다. 그래서 B는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점을 학습하겠죠. 그래서 A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을 보일 겁니다.



이제 위의 두 실험조건을 하나로 합쳐보겠습니다. 아래와 같이 먹이와 전기충격 장치를 B 위치에 같이 놓으면, 이 불쌍한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A --------------------------- B
(쥐)                                     (먹이 & 전기충격)

이 쥐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픈 상태입니다. 그래서 B에서 솔솔 풍겨져 나오는 먹이 냄새로 인해 배고픔이 더욱 가중되겠죠. 하지만 이미 B에 가면 상당히 기분 나쁜 전기충격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쥐는 먹이를 향해 조금 다가가다가 좁은 길 위의 어느 지점에 머물며 먹이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상황을 연출하겠죠.

B쪽으로 갈수록 먹이의 유혹이 커져서 B쪽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B쪽으로 갈수록 전기충격의 '악몽'이 더욱 생생해져서 B로부터 멀리하려는 욕망이 균형을 이루는 위치에서 쥐는 걸음을 멈출 겁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쥐는 그 위치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쥐의 욕망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전기충격을 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가 '먹이에 접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보다 더 큽니다. 그 이유는 대개의 동물이 생존을 위해 일단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생명에 지장을 줄 거라 여기는 것)에 더 큰 가중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닐 밀러(Neal Miller)라는 심리학자가 1944년에 수행한 고전적인 실험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두 개의 동기가 충돌하는 갈등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었죠. 닐 밀러는 음식에 접근하고자는 동기와 전기충격을 회피하고 싶은 동기 사이의 갈등을 '접근-회피 갈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어떤 대상에게로 다가가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때 겪는 갈등을 말합니다. 

인간도 수없이 다양한 '접근-회피 갈등' 상황에 놓입니다. 이 '접근-회피 갈등'이 조직 운영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조직의 리더들은 구성원들이 뭔가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하기를 기대합니다. 좀더 획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도하기를 원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독려합니다.

하지만 많은 도전들은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지만 그 성공확률은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 얻게 되는 손실과 도전 과정에서 소요된 돈, 시간, 인력 등이 시도하지 않았으면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으로 인식됩니다. 그 바람에 도전에 실패하면 도전을 독려할 때와는 판이하게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집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자를 찾고 그 사람을 희생양 삼으려는 사태까지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나중에 생길 또다른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의 불쌍한 쥐가 겪었던 '접근-회피 갈등'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뭔가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비난과 벌을 받았던 경험이 있을때, 실패한 다른 도전자의 말로를 직접 보고 들을 때, 조직이 실패에 '필벌'하는 문화가 강할 때, 어느 누구도 선뜻 도전의 열매를 취하려 발벗고 나서기가 힘들 겁니다. 비록 그 도전을 성공리에 마쳤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회사는 실패를 너그러이 용인한다' 혹은 '실패를 장려한다'라며 외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질 않는다', '직원들은 도전정신이 없다'며 한탄하는 '입'들을 자주 만납니다. 도전에 성공하면 나름 괜찮은 금전적, 비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도 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알아서 착착 하지 않는지 답답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업들은 진짜로 실패를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먹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더 큰 '전기충격' 장치를 함께 가져다 놓고서 직원들에게 그곳으로 달려가라 명하는 것이 과연 먹힐지, 그렇게 명하는 자기 자신은 그곳으로 달려갈 용기가 진짜로 있는지 자문하고 자답해야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업무 수행을 잘 하려다가 몇 천만 원 가량의 손실을 회사에 끼쳤다고 합니다. 그 분의 상사가 괜찮다면서 자신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노라고 다독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어떻습니까? 진짜로 실패를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척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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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은 당신의 권리이자 의무다   

2011. 6. 29. 09:00



자기비하를 멈추는 것에서 도전은 시작된다
나는 가끔 수첩에 그림을 그린다. 주로 찻집에서 혼자 커피를 마실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곤 한다. 취미 수준에도 미치지 않을 법한 그림 수준이라 꽤 조심스럽게 그린다 해도 어긋나는 선이 생기곤 한다.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그리기 때문인데, 그냥 선 몇 개를 더 그려 넣어 실수를 대충 무마한다. 특히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엔 아주 젬병이다.



어느 날은 누워있는 아들의 모습을 그렸다. 다 그리고 아들에게 보여주니 "내가 왜 이렇게 생겼어?"라며 울상을 지었다. 초등학생을 늙은 아저씨의 얼굴로 그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들은 그림이 싫다며 수첩을 찢을 기세로 달려들고 아이의 엄마도 합세하여 면박을 주었다. 나름 힘들여 그린지라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봐도 한심하고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정말 못 그린 그림이야!’ 라며 자학하는 수밖에.
 
반면 내 그림을 무시하는 아들은 자기 그림을 폄하하는 법이 결코 없다. 아들은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는 늘 이렇게 말한다. "정말 잘 그렸지요? 예쁘죠?"라고. 감탄이 나오는 그림도 있지만 솔직히 낙서 같은 그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들은 항상 자신의 그림에 무한한 자긍심을 보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리지요?"라며 스스로를 극찬하기도 하니까.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자기비하를 할 줄 모른다. 9살 이하의 아이는 언제나 자기 작품을 한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며 높은 자존감을 드러낸다. 이런 아이들이 커가면서 불행히도 자기비하를 배운다. 사회화의 과정이라지만 씁쓸하다. 자신을 혹평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은 포기를 합리화할 줄 알게 된다는 의미이고 소질이 계발될 기회를 스스로 묻어버림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기비하는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즐거움과 희열을 싸구려 감정으로 전락시키고 그대로 마음의 앙금으로 쌓이게 만든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정체(停滯)이다. 자기비하가 계속되면 정체의 늪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자기비하의 관성을 버리고 도전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개선과 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감상하듯 즐기고 반성을 통해 배운다면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작품과 만나게 된다. 자신의 못난 그림에도 뻔뻔해지자.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 아무렴 어떤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린 그림이다"라고 외치자. 자기비하라는 가뭄을 끝내고 자신감이라는 단비를 내려주어야 도전의지가 자란다. 자기비하는 개인과 조직의 도전의지를 갉아먹는 해충일 뿐이다.

도전하지 않는 조직은 위험하다
1979년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DC-8-61편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행기가 포틀랜드 공항에 접근했을 때 랜딩 기어가 말을 듣지 않아 기장과 부기장은 애를 먹었다. 그들은 랜딩 기어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기다리면서 공항 근처를 1시간 정도 선회하려고 했는데, 2명의 승무원이 연료계의 바늘이 0을 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은 즉각 기장에게 보고해야 할 위급한 상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들은 기장이 무서워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기장은 평소에 자신에게 질문하거나 의견을 제안하는 걸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승무원들은 혼나는 게 무서워 죽음을 택하는 믿기 힘든 결정을 했다. 연료가 다 소진되자 모든 엔진은 꺼지고 말았고 비행기는 공항에서 10Km 떨어진 지점에 추락했다. 기장의 거짓된 권위와 승무원들의 나약함 때문에 무고한 승객들이 죽거나 크게 부상 당했다.
 
사고의 근본원인은 도전을 허용치 않은 권위의식에 있었다. 이처럼 바람직한 도전을 굴복시키는 권위의식이 팽배할 때 조직은 치명적인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고 만다. 도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Challenge를 영영사전에서 찾아보면 ‘진실, 가치, 권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라는 뜻이다. 전통, 규칙, 습관 등처럼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바꾸기 힘들 것이 부정적인 권위를 형성한다. 그런 권위들을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따져보며 옳은 것은 수용하고 옳지 않은 것은 가차 없이 깨뜨려 나가지 못한다면 비행기가 추락해도 입을 봉하던 승무원과 다를 바 없다. 여러분은 그런 비행기에 타고 싶은가?

도전은 도약의 엔진
위대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맹목적으로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던 실업자 시절에 그는 물리학 논문들을 탐독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편지를 보내어 오류를 지적하곤 했다. 그 때문에 ‘권위자’들의 분노를 사 소망하던 대학 교수 자리를 오랫동안 얻지 못했지만 그는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그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그의 무모한 도전에 있었다. 사실 동시대에 앙리 푸엥카레 역시 시간의 상대성을 주장했지만 그는 여전히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함몰된 탓에 과거의 이론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푸엥카레는 전형적인 완고한 전통주의자로서 ‘에테르’라고 하는 가상의 물질을 고집하느라 위대한 발견의 문턱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거추장스러운 기존의 틀을 폐기하면서 물리학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는 수백 년 동안 과학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사고방식과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물리학의 커다란 도약을 이루어냈다.
 
HP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팩커드는 어느 날 연구소를 방문해서 모니터를 개발 중이던 젊은 엔지니어에게 개발을 포기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엔지니어는 이에 불응하고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낸 목적은 쉬기 위한 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를 돌아다니면서 잠재고객들에게 모니터를 보여주고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고객들이 모니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연구를 강행하고 상사를 설득해 결국 모니터를 생산해내어 결국 3,500만 달러라는 높은 매출을 올렸다. 팩커드는 그 엔지니어를 벌하기는커녕 "탁월한 도전"이라고 치하하며 메달을 수여했다. 팩커드는 도전이 도약의 엔진임을 아는 경영자였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를 차가운 머리로 의심하고 도전하라. 최고권력자든, 오래된 믿음이든, 최신 유행이든, 난공불락의 경쟁사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덤벼 이겨라. 도전이야말로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이 글은 'SPP조선'의 사보 'SPP Magazine 18호' 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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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과 권위에 도전하라   

2009. 6. 1. 20:29

권력은 때로는 잘못된 권위를 형성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권위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옷이 보인다는 여러 신하들의 말에 속아 나체로 거리행차에 나섰듯이, 권위는 종종 우리를 기만하고 심할 경우 몰락시키기도 한다.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고 굴복 당하거나 순응할 때 우리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1979년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DC-8-61편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추락한 원인은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 나약함에 있었다.

비행기가 포틀랜드 공항에 접근했을 때 랜딩 기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다. 랜딩 기어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기다리면서 공항 근처를 1시간 정도 선회하려고 했는데, 2명의 승무원이 연료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즉각 기장에게 보고해야 할 위급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그들은 기장이 무서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 기장은 평소에 자신에게 질문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는 걸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연료가 다 소진되자 모든 엔진은 꺼지고 비행기는 공항에서 10Km 떨어진 지점에 추락하고 말았다. 기장의 권위와 승무원들의 나약함 때문에 무고한 승객 10명이 죽고 23명이 다치고 말았다.


도전은, 때로는 신념을 옥죄는 권위의식과의 싸움이다. 1854년 8월 영국 런던의 브로드 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불과 열흘 만에 반경 200 미터 이내에 살던 주민 중 5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콜레라는 그 시절에 흔히 있는 전염병으로서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그처럼 국지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경우는 유례 없었다.

사실 콜레라는 공기가 아니라 물에 의해 전염되는 ‘수인성 전염병’이지만, 당시 모든 과학자들은 ‘나쁜 냄새’가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견해(이를 ‘독기론(毒氣論)’이라 한다)를 고집했다. 단 한 사람, 존 스노(John Snow)만은 예외였다.

그는 독기론을 반박하기 위해 나쁜 냄새 때문이 아니라 분뇨로 오염된 물을 먹은 주민들이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모든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어떤 수도 회사(당시 영국의 수도사업은 민영화된 상태였다)로부터 물을 공급받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독기론이 우세하던 시절에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곳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매일 묵묵히 조사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끝내 발병의 진원지가 기저귀를 빤 물이 스며든 마을의 공동우물임을 증명해 냈다.

콜레라 연구에 뛰어 들기 전, 스노는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을 마취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실용화했다. 저널리스트인 볼프 슈나이더(Wolf Schneider)가 “전신 마취술은 전화나 컴퓨터의 발명보다 뛰어난 문화사적 발전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것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수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으로서 스노는 영국 왕족이 인정하는 최고 명의(名醫)로서의 권위를 이미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의 위대성이 빛나는 이유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내가 그런 것까지 해야 돼?’라고 생각할 만한 권위의식을 스스로 깨뜨리고 신발에 직접 흙을 묻히며 전염병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과 타인의 권위를 깨뜨리는 자에 의해 발전한다.

감히 대들 수 없을 것 같은 안온(安溫)한 모든 권위를 차가운 머리로 의심해 보라. 그리고 도전하라. 최고권력자든, 종교든, 신념체계든 대상이 누구라도 덤벼 이겨라. 이것이 이 땅의 젊은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숙명이자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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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쳤어요!   

2008. 5. 19. 19:23

    "우리 직원들은 어떤 목표가 정해지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다.
     제 아무리 어려운 주제의 일이라도 직원들은 화합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의 '도전정신'은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인터뷰 때 나온 이야기다. 나는 그 직원의 말을 듣고서 머리를 갸웃했다. '도전'이란 말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도전'이란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일단 도전이란 단어에는 무엇인가를 향한 '반항'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타파할 대상이 반드시 '도전한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타파해야 할 대상이란 전통, 규칙, 습관 등처럼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바꾸기 힘들며 신성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을 말한다. 이런 모든 '권위'들을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따져보면서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깨뜨려 나갈 때 우리는 그것을 도전이라고 부른다.  요약하면, 도전이란 모든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그 권위의 크기와 범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다.

도전 =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열심히 일하거나 협력을 잘 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도전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해내기 어려운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것이 바로 도전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는 숱한 권위(그게 무엇이든 간에)를 깨뜨리려는 의지와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우리는 그걸 도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한 그 직원의 회사는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려는 도전 의지보다는 오히려 권위가 회사의 안정적인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회사의 문화가 도전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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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맹목적으로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던 실업자 시절에 그는 물리학 논문들을 탐독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편지를 보내어 오류를 지적하곤 했다. 그 때문에 그는 '권위자'들의 분노를 사서 소망하던 대학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특허사무소의 사무관으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도전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그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그의 무모한 도전에 있었다. 사실 동시대 학자인 앙리 푸엥카레도 상대성 원리의 근처까지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함몰된 탓에 과거의 이론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로서 '에테르'라고 하는 가상의 물질을 고집하느라 위대한 발견의 문턱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거추장스러운 기존의 틀을 폐기하면서 물리학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인정 받는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역시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역시 위대한 물리학자로 불리는 닐스 보어가 파인만이 근무하던 곳(로스엘러모스)에 세미나를 하러 온 일이 있었다.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에 대한 독창적인 가설을 제시한 학자로서 당시에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신적인 존재로 여겨진 사람이었다.

보어가 세미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도중에 파인만은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미쳤어요!" 그때 파인만은 박사학위를 갓 따고서 교수 자리를 알아 보던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파인만은 조금이라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가 누구든지 이같이 대들던(도전하던) 사람이었다. 보어는 파인만의 도전적인 태도에 감동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친구로서, 내가 잘못되면 바로 지적할 사람이다.
    나중에 내가 아이디어를 토론할 일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옳소'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필요 없다. 나는 그를 제일 먼저 불러서 이야기하고 싶다."

도전은 열정이 아니다. 도전은 묵묵히 수행하는 정진도 아니다. 도전은 자신을 옥죄는 '권위'라는 신성불가침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이다. 열정도 정진도 그 껍질을 깨고자하는 도전이 없으면 의미 없는 소진일 뿐이다. 감히 대들 수 없을 것같은 안온(安溫)한 모든 권위를 차가운 머리로 의심해 보라. 만일 그것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파인만이 그랬듯이 이렇게 외쳐라. "당신은 미쳤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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