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호는 왜 폭발했나?   

2010. 5. 24. 09:00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를 기억하십니까?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는 발사된지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하고 맙니다. 교사 신분으로 우주인으로 선정된 민간인 여성을 포함한 7명의 승무원들은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켓 부스터 내에서 누출을 막아주는 고무 오링(O-ring)이 추운 날씨로 인해 갈라져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진상규명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해서 얼음물 속에 클림프로 꽉 조여진 고무 오링의 샘플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했지요.

(챌린저호 폭발 모습)


사고가 터지면 왜 그것이 발생했는지를 따지는 일련의 진상규명 작업이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챌린저호 사건은 미국의 우주개발 노력에 치명타를 가한 중대한 사건이었기에 각계의 전문가가 NASA의 잘못을 집중적으로 캤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NASA가 방만하게 조직을 운영한다느니, 느슨하게 직원들을 관리한다느니, 추운 날씨라서 오링이 갈라질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느니, 모두다 비난 일색의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자인 다이앤 본(Diane Vaughan)은 색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그녀는 챌린저호 폭발을 일으킨 원인을 명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NASA라는 거대한 조직의 시스템 내에 사고의 원인이 잠재되어 있다는 의미였죠. 그녀는 더 나아가 NASA가 규칙을 준수하면서 일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알듯 모를듯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을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주 왕복선은 수많은 모듈과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각 부품이 100% 완벽하게 동작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자동차는 양산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번 테스트를 거치면서 오류를 수정해 갑니다. 하지만 우주 왕복선은 특성상 시험 비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각 부품에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없애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막대해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일정한 크기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규칙으로 NASA 내부에 자리잡았습니다. 폭발을 일으킨 오링의 문제도 사전에 여러 차례 지적되긴 했으나 '수용 가능한 위험'의 목록에 있었기에 넘어가고 말았죠. 

하나의 부품으로 이뤄진 기계는 그 부품의 신뢰도를 0.5%P 향상하면 시스템 전체의 신뢰도도 그만큼 향상됩니다. 반면, 100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기계는 한 부품의 신뢰도를 0.5%P 향상했다고 해서 시스템의 신뢰도가 동일한 크기만큼 상승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의 풀이를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겁니다.

모든 부품의 신뢰도는 각각 99.0%
100 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시스템의 신뢰도 =  (99.0%)의 100제곱 = 36.60%

특정 부품 A의 향상된 신뢰도 = 99.5%
나머지 부품의 신뢰되는 각각 99.0%
100 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시스템의 신뢰도 = 99.5% * (99.0%)의 99제곱 = 36.79%

특정 부품 A의 0.5%P 신뢰도 향상으로 인한 기여도 = 36.79 - 36.60 = 0.19%P

수만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우주 왕복선 시스템 전체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려면, 해야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따라서 NASA가 '수용 가능한 위험'을 허용했다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보면 현명한 행동규칙이었습니다. 

NASA의 구성원들이 특별하게 태만하게 근무했거나 뻔한 실수나 비리를 저지르지 않아도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규칙을 준수한 탓에 사고가 초래됐다?" 언뜻 생각하면 이상한 말이지만, 다이앤 본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챌린저호 승무원들)


챌린저호 폭발 사건으로부터 조직의 운영이나 전략을 실행하는 데에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고의성이 없고 무해한(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별적인 의사결정이 조직 전체를 와해시키는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조직 내 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둘째, 개별 부품이나 프로세스를 미시적으로 개선한다고 해서 시스템 전체의 안정을 기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역시 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 더 그렇지요. 시스템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질 때엔 시스템의 아키텍쳐 전체를 뒤집어 엎는 혁신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셋째, 문제가 터지고나서 그 발생원인을 따지는 과정은 책임 소재를 찾아 '응징'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문제의 근본원인을 제거하는 데엔 그다지 소용이 없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시스템과 제도를 아무리 정교하게 수정한다 해도 언제나 그 안에 시스템을 붕괴시킬 위험요소가새롭게 창출되기 마련입니다. 완벽을 기하기 어려워 조금씩은 허용 가능한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째 시사점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울한' 일면입니다. 시스템 안에는 스스로를 붕괴시킬 위험요소가 상존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시스템이 서서히 '스러져 가는' 현상인 노화와 죽음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만큼 피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시스템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펴봤듯이 개별 요소의 신뢰도를 끌어올려서 시스템 안정도의 완벽을 기하겠다는 생각은 무모하고 그 이익도 노력에 비해 미미합니다. 그렇다고 시스템 전체를 뒤집어 엎는 일도 꽤나 지난하고 매몰비용(sunk cost) 때문에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는 심리적 장벽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개별 요소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되 하나의 요소에서 발생한 오류가 시스템 전체로 연쇄되지 않도록 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현명한 조치입니다. 오류가 전염되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의 방어벽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면역계가 생명이라는 시스템을 그런 방식으로 수호하듯 말입니다.

여러분의 시스템, 여러분의 조직, 여러분의 전략은 얼마나 안정적입니까? 어떤 상태이든 너무 신뢰하진 마십시오.

(언뜻 든 생각 : 천안함 사건을 챌런저호 폭발과 대비해 보면 어떨까요? 잘 모르겠으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넗힐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 참고도서 :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호모 파베르의 불행한 진화'(킴 비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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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발견자 왓슨은 왜 침묵했나?   

2010. 3. 24. 09:00

DNA 구조를 규명하여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을 아십니까? DNA라고 말하면  ‘왓슨과 크릭’의 이름이 항상 따라 붙을 만큼 그들은 생물학계의 스타입니다. 

왓슨

윌킨스

크릭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불리함이 드러날까봐 끝까지 침묵을 지킴으로써 한 여자의 일생과 업적을 철저히 모욕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100% 자신들의 노력으로만 DNA 구조를 규명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DNA를 발견할 당시 그들은 케임브리지 대학 소속이었는데, 런던 킹스칼리지의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과 DNA 구조 규명을 위한 연구 경쟁을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DNA가 이중나선 형태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얻게 된 계기는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사진이었습니다.

그녀의 동의 하에서 사진을 열람했다면 문제가 될 게 없었겠죠. 하지만 그들은 꼼수를 썼습니다.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프랭클린과 그의 상급자 윌킨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윌킨스는 왓슨과 크릭을 수 차례 만나 그녀를 헐뜯으며 심정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었지요. 급기야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찍은 사진을 몰래 빼내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사진을 보고 나서 겨우 일주일 만에 DNA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네이처’ 지에 1 페이지 짜리 논문을 게재했죠. 알다시피 1963년에 그들 셋은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누가 봐도 도둑 맞은 프랭클린의 X선 사진이 DNA 구조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기여를 무시했고, 그녀가 암으로 1958년에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숨지고 나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정직하지 못한 태도였습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왓슨은 수십 년이 흐른 1984년에 프랭클린의 모교인 세인트폴 여학교에서 연설하면서조차 끝내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그녀의 데이터를 생각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지, 훔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애매한 변명만 늘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확인되지 않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죽은 자의 무덤에 침을 뱉고 말았죠. 크릭과 윌킨스는 왓슨만큼 노골적이지 않았고 죄책감을 많이 느끼긴 했지만, 그들 역시 진실 고백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라면 그들의 태도를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일갈했을 것 같군요.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과학적 사고는 전적으로 정직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실험을 했다면, 여러분에게 불리한 것까지 모두 말해야 한다. 유리한 것만 말해서는 안 되며,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중략)....여러분의 해석에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다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론에 잘 맞는 사실 뿐만 아니라 잘 맞지 않는 사실까지 모두 알려 주어야 한다.

정직 = 불리한 것까지 밝히는 용기

정직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주장할 때 옳은 면뿐만 아니라 불리한 증거와 배경까지 함께 이야기함을 의미합니다. 정직은 솔직하게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입이다. 불리한 면을 감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부정직한 태도입니다. 

파인만이 초전도성 연구를 진행할 때 보인 언행은 그가 말만 번드르르한 지식인이 아니라 정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과학자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초전도성은 금속을 매우 낮은 온도로 냉각했을 때 전기 저항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파인만은 초전도성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정립했으나 다른 물리학자 세 명(존 바딘, 리언 쿠퍼, 존 슈리퍼. 이들은 197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다)이 BCS이론으로 불리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자 자신의 것을 버리고 즉각 그들의 이론이 옳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폐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식석상에서 BCS이론의 우수성을 칭찬했지요. 존 슈리퍼(John Schrieffer)는 파인만의 정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아 “과학자가 자신이 실패한 분야에서 남의 이론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파인만의 전기를 쓴 물리학자 존 그리빈(John Gribbin)이 “그의 정직성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었고, 틀린 나무에 오르면서 자기가 바르게 간다고 속아 넘어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는 능력을 명료하게 보여줬다”고 썼습니다. 그의 행동은 왓슨 트리오가 보여 준 자기방어적인 부정직함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주 정직한 사람도 자신에게 불리한 점이 발견됐을 때 침묵을 지키거나 솔직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사건이 터지면 대개 그런 행태를 보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감추지 말고 떳떳이 밝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사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왓슨이 다다르지 않은 정직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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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판단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편협한 판단과 엉뚱한 해법을 내릴 위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오류를 수용할 줄 알아야 진정한 문제해결사입니다. 자신의 오류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커피 마시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들은 세상이 망할 거라는 둥,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UFO를 타고 올 거라는 둥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예언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세계 종말이 예정된 시간이 경과해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변명합니다. 

“너그러운 신께서 우리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셨다.” 라고 둘러대거나 “신도들이 성심을 다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하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비 종교의 세계에서는 오류가 절대 용납되지 않을뿐더러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국 한(漢)나라의 시조 유방(劉邦)은 영웅호걸이기 이전에 열린 마음을 가진 문제해결사의 전형입니다. 수하에 있던 장수인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정복한 후에 제나라 왕을 대리하려 하니 윤허해 주기를 청하는 특사를 유방에게 파견했습니다. 

편지를 보자마자 유방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망할 자식! 이 놈이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라며 욕을 퍼붓습니다. 라이벌인 항우(項羽)에게 쫓기는 상황인데 도와주러 올 생각은커녕 공적만 챙기려는 한신이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참모인 장량(張良)이 유방의 발뒤꿈치를 조용히 밟습니다. 밟히는 그 순간 유방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직감하고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을 바꿉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사내대장부가 나라를 평정했으면 정식으로 왕이 되어야 하거늘, 무슨 얼어죽을 대리냐! 정식으로 제나라 왕에 오르게 하라.” 

장량이 자신의 발뒤꿈치를 밟는 순간 ‘아뿔사, 내가 화를 내다니! 힘이 막강한 자이니 한신을 섭섭하게 하면 안 된다. 이용 가치가 있으니 지금은 참자’ 라고 생각을 급선회했습니다. 자신의 분노가 경솔했음을 즉시 깨닫고 오류를 인정하는 아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유방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화가 난 상태에서 감히 참모가 자신의 발을 밟았다고 장량에게 노발대발하지는 않았을까요? 유방은 성격상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듯이 그의 '순발력 있는 아량'은 진나라 멸망 후의 혼돈을 잠재우고 역사상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습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P. Feynman)은 “과학자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최대한 빨리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문제해결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진정한 문제해결사는 오류를 지적 받으면 겸허하게 수용하고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고 보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해결사에게는 문제해결이 최종 목적이지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시각을 꺾어버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오류에 빠지더라도 그를 심하게 몰아 세우거나 폭언에 가까운 논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주관도, 너의 주관도 모두 불완전’하므로 타인의 실수를 관용하고 협의를 통해 좀더 나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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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리처드 파인만은 배움의 자세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일침을 가한다. 그는 모든 걸 처음부터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면서 배웠다. 위대한 학자들이 이미 밝혀 놓은 것이라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 대로 그는 의심하면서 배우는 습관을 키웠다.

그는 고대 학자들이 2천년 전에 이미 정립해 놓은 수학 규칙을 스스로 발견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았다. “나는 공식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스인이든 바빌로니아인이든 누군가에 의해 이미 풀렸다는 것은 내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였고 나는 여기에서 재미를 얻어야 했다.”

그는 한때 브라질 물리학연구센터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강의실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빛이 바다에 반사되면 편광효과(偏光 : 빛의 일부만 통과하는 현상)가 발생한다는 걸 설명했다. 학생들은 그걸 보고 아주 재미있어 했지만, 편광이 발생하는 이론과 바닷물 색깔이 푸른 이유를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학생들은 그저 모든 것을 그냥 암기할 뿐 그게 어떻게 응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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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이 즐겨 타던 밴


파인만은 1년 간의 브라질 체류를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브라질에는 물리학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그렇게 많고 미국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시작하는데 브라질에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 놀랍다.”

5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2천 년대에 사는 우리나라도 그 당시의 브라질과 똑같기 때문이다. "한국엔 유명한 물리학자가 별로 없다"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다. 배우긴 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응용할 줄 모른다. 시험을 보기 위해,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그저 외운다. 배우는 것은 책상 머리에서만 머물 뿐 실생활로 이어지지 않는다. 배움은 배움 자체의 의미를 잃은 채 생존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고 회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정리하면, 배운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의심하면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이다. 학교나 책에서 습득한 것들이 진짜 그렇게 되는지 스스로 밝히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배운 바가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 배움이다.

배움 = 의심 + 응용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배움의 과정에서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서는 안 되는 걸까? 아래의 그림을 보라. 두 그래프의 ‘수직상’ 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다음 중 옳은 것을 골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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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그래프는 서로 가깝게 다가간다
(2) 두 그래프는 서로 멀어진다
(3) 두 그래프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모르긴 해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1)을 택했을 것이다. 정답은 (3)이다. 의심스럽다면 직접 자를 가지고 재 봐도 무방하다. B 그래프는 A 그래프를 아래 방향으로 그대로 수직 이동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직상의 거리는 항상 일정하다. 내가 위에서 ‘수직상’ 거리라고 작은 따옴표로 묶어 강조했음에도 그걸 눈 여겨 보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의 통계학자인 윌리엄 클리블랜드(William Cleveland)는 두 그래프가 근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수평상의 거리는 잘 측정하지만 수직상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는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눈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두 그래프가 점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인간의 심리적인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작에 의해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학습할 때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말고 항상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배움 = 의심).

또한, 배움은 반드시 응용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디트리히 되르너(Dietrich Dörner)는 실험 참가자들을 A, B, C 세 팀으로 나눈 다음 그들에게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방법을 교육시켰다. 그는 일부러 A팀과 B팀에게는 상당히 자세하고 정교한 절차를 가르친 반면, C팀에게는 체계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대충 가르쳤다.

당연히 A팀과 B팀은 교육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고 C팀은 교육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되르너가 교육의 결과를 응용해야만 풀 수 있는 과제를 내 주자 세 팀의 실제 성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우리는 보통 어떤 지식을 알고 나면 스스로 ‘똑똑해졌다’고 착각하기 쉽다. 파인만이 실망감을 표했던 브라질 학생들도 아마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 해도 현실에서 그걸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지지는 않는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되르너는 “지식의 ‘습득’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경험을 대신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응용을 통해 체득된 지식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배움 = 응용).

배우는 과정에서 의심하고 응용하는 자세를 꾸준히 한다면 미처 알지 못했던 오묘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며 기초를 다질 수 있다. 단순히 외우기만 하면 그건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론으로 배웠거나 상식으로 아는 것들이 사실 옳지 않다는 걸 깨달음으로써 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만일 비행기에 2살 미만의 유아를 데리고 탑승할 때 어른의 무릎에 앉히지 말고 반드시 유아용 좌석에 앉히도록 의무화한다면 많은 부모들은 별 의심 없이 환영 의사를 보일 것이다. 유아용 좌석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걸 상식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유아용 시트가 안전하듯이 비행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실은 유아용 좌석이 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자동차의 유아용 시트도 안전을 더 위협하긴 마찬가지다. 많은 운전자들이 시트의 안전함만 믿고 더 난폭하게 운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아이를 반드시 유아용 좌석에 태워야 한다면 비싼 항공기 요금을 그만큼 더 내야 한다. 그래서 비행기보다 훨씬 위험한 자동차로 여행하는 걸 선택하게 되고, 안전을 위해 내린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잃게 만든다. '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일견 당연한 듯이 보이는 질문을 던져보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응용될 수 있는지 고민하자. 삶의 지혜는 단순하며 자명한 듯 보이는 질문에 답하고, 지식과 현실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체득되는 것임을 기억해 두자. 삶은 늘 배우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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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IQ를 믿습니까?   

2008. 6. 1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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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네이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IQ를 알고 나면 과연 그를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IQ를 지적 능력의 측정치로 볼 수 있는지 의심이 들 것이다. 파인만은 운이 좋았다면 노벨상을 하나가 아니라 3개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여동생인 존이 학교에서 실시된 IQ 검사 결과를 몰래 훔쳐 보았는데, 그녀는 124였고 오빠는 123이었다.  (여동생은 역시 과학자가 됐다)

둘 다 통상적으로 천재의 IQ에는 미치는 못하는 수준이었다. IQ 148 이상이고 상위 2%에 해당하는 사람의 클럽인 ‘멘사’(Mensa)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파인만에게 가입을 권유했을 때 평소 장난기가 많은 그는 “미안하지만 당신들만큼 지능지수가 높지 않기 때문에 가입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평소 지적 허영에 찬 집단인 멘사를 비꼬던 차였기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아주 재미있어 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비네에 의해 처음 도입된 IQ는 원래 특별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능력이 뒤떨어지는 아이들(학습지진아)을 식별하기 위한 도구로 한정되어 있었다. 비네는 학습지진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지적능력을 측정하고 싶어했을 뿐, IQ가 일반화돼서 모든 사람의 지능 수준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IQ가 비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능 서열 매기기의 장치로 오용된 것은 미국의 루이스 터먼(Lewis M. Terman) 의 공(?)이 컸다. 그는 오늘날 범용적으로 쓰이는 IQ 테스트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전5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천재에 대한 유전적 연구(Genetic Studies of Genius)’를 통해 이미 세상을 떠난 천재들의 IQ 테스트 결과를 과감히 발표하기도 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135, 지동설을 주장한 천체 물리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겨우 105 정도로 측정했다.

측정방법은 이랬다. 먼저 기본 점수로 IQ 100을 할당했다. 그런 다음, 남아있는 역사 자료를 토대로 해서 이 값에 점수를 더하거나 빼는 방식을 취했다. 이 방법의 문제는 남아있는 자료의 양에 따라 IQ 측정값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료가 많은 사람은 IQ를 높게 받을 수 있어서 유리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유년기 정보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인물은 터무니없이 낮은 IQ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IQ는 지능검사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이 높게 나올 뿐, 창의력, 문제해결력, 탐구력과 같은 ‘지적 능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IQ의 창시자인 비네가 주장했듯이, IQ는 학습지진의 여부를 측정하는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IQ가 학교 성적, 연구 업적, 사회적인 성공 등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걸 볼 때 IQ를 한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IQ가 높다는 것이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또 능력 있는 사람이 IQ가 높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IQ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그저 어떤 사람이 지닌 잠재력의 크기를 나타내는 측정치 정도로만 여겨져야 한다.요즘 IQ를 대신해서 등장한 EQ니 SQ니 하는 것들도 인간의 능력을 서열화하는 도구가 될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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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네이버

찰스 다윈은 자신의 사촌이자 지능 신봉자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보를 제외하고, 인간은 지능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열의와 노력뿐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기본적인 지적 능력은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나는 것은 열의와 노력을 통해 얻어진 능력이다.”

아직도 당신의 IQ가 낮음을 책망하고 혹은 IQ가 높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인류 발전을 위해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하는 멘사라는 '자기만족형 클럽'에 부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지적 능력은 토마스 에디슨의 유명한 말처럼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짐을 오늘 하루 가슴 속에 새겨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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