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에 벌어진 9/11 사태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던 9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결연한 어조로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칭할 만한 발언을 합니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편이 될지, 테리리스트의 편이 될지를!"

부시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탈레반 조직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사이에 연관관계가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압박합니다. 물론 이라크가 탈레반 조직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적극적인 후원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국제사회를 향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데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를 감찰하기 위한 유엔 사찰단의 구성을 이끌어 내죠. 그리고는 이라크에게 "무엇이 감춰져 있는가? 왜 감추는가?"라고 말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결국 이라크는 자국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하지 않으면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거부한다고 밝혔습니다(정확히 말하면, 초기엔 받아들였다가 민감한 시설들의 감찰은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게 이라크를 침공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가설인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를 실증했기 때문입니다.

[가설]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

[전제] 감출 것이 없으면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허락할 것이다
         감출 것이 있으면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거부할 것이다

[근거] 이라크는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거부했다

[결론] 따라서,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정부가 가설을 실증하기 위해 사용한 '전제' 부분입니다. 미국정부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가 가졌다면 들키지 않기 위해 유엔 사찰단의 감시를 피하고자 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떳떳하게 사찰단의 조사를 환영할 것이라는 전제를 실증에 적용했습니다. 이 전제는 옳을까요? 여러분은 미국 정부의 전제에 동조할지 모르겠군요. 

사담 후세인은 미국을 향해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미국과 대적해 실제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할 만큼 대담한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990년에 벌어진 1차 걸프전에서 미국의 막강한 화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패배를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에 미국을 자극할 동기가 없었죠.

그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의 20년 넘는 장기 집권은 대량살상무기와 같은 '거짓 공포'에 의해 유지돼 왔기에 유엔 사찰단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음을 증명한다면 정권의 기반이 위태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가 없음을 감춰야 했기에 사찰단 방문을 거부했던 겁니다. 따라서 위의 실증에서 사용된 전제인 '감출 것이 없으면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허락할 것이다'는 잘못됐습니다. 

이 전제는 철저하게 '잘못이 없으면 당당하게 대응하라'는 미국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사담 후세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신들만의 생각이었죠. 권력욕이 강한 후세인의 입장을 반영하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는 가설을 올바르게 실증하려 했다면, 유엔 사찰단을 이용해서 만천하에 보유 여부를 드러내자는 식의 전제는 지양했어야 합니다. 미국이 후세인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다음과 같은 사고를 전개했어야 합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을 경우,  
  → 사찰에 걸리면 미국으로부터 제제를 당할 것이다
  → 따라서 사찰단 조사를 거부할 것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경우,
  → 없다는 것이 공개되면, 권력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 따라서 사찰단 조사를 거부할 것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있거나 없거나 이라크가 사찰단의 조사를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간파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밝히고 싶었다면 유엔 사찰단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지요.

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대거 포진한 미국 정부가 이라크 입장을 고려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떤 경우에든 이라크가 사찰단을 거부할 것임을 알고서 이라크를 압박했는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입장에선 이라크에게 사찰단 조사를 강요하는 방법이 (아마도 이라크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최고의 전략이었을 겁니다. 딜레마를 현명하게 타개하지 못한 순진한 후세인이 전쟁의 빌미를 확실하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면 부시는 바보가 아니라 똑똑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점은 2가지입니다. 첫째, 잘못된 전제는 잘못된 실증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봤듯이 문화적 배경과 처한 입장 등에 따라 가설 실증을 뒷받침하는 전제가 달라짐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각각 다른 전제를 가지고 가설을 바라본다는 점은 문제해결사가 꼭 염두에 둘 사항입니다.

둘째, 트릭을 쓴 전제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좁게는 미국의 국민과, 넓게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감출 것이 없으면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허락할 것이다"란 전제에 속아 넘어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문제해결을 방해하거나 자기 식대로 밀고나가기 위해 고의적으로 '뒤틀린 전제'를 사용하는 자를 조심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문제를 둘러싼 이해관계자 중에 이런 방식으로 몰고가는 '부시 같은 자'가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니 필히 경계하기 바랍니다.

올바른 전제가 올바른 실증을 이끕니다. 올바르지 않은 전제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전쟁을 촉발시킬지 모릅니다. '천안함 사고가 누구의 소행이냐'는 실증에서 정부가 들이댄 전제들은 과연 옳을까요? 그것이 옳건 그르건, 우리 모두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시할 일입니다. 그럴 자유는 있으니까요.


(*참고도서 : '생각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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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보고서는 베개로 쓰세요   

2010. 5. 4. 09:00

어떤 사람이 회사의 구매 프로세스와 구매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구매 프로세스를 혁신하면 5년 동안 10억 달러이나 되는 막대한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변화를 발화시키는 방법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의 경영진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매 프로세스가 워낙 안정된 관행이라서 혁신에 대한 저항이 무척 크리라 예상됐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얼마나 문제이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관해 충분한 근거와 데이터가 있어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꾀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구매 프로세스가 잘못됐다는, 가장 확실하고 충격적인 사례 하나를 골라서 집중적으로 파고들기로 했습니다. 그가 택한 아이템은 바로 장갑이었습니다. 그는 인턴 사원을 채용해서 공장 등에서 사용하는 모든 작업용 장갑의 구매 단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지요.

조사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슷한 모양의 비슷한 품질을 가진 장갑이었는데, 어떤 것은 켤레당 5달러에, 또 어떤 것은 17달러나 주고 구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따로따로 구매하는 장갑의 종류가 424가지나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인턴 사원을 시켜서 424가지의 장갑에 일일이 가격표를 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중역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의 탁자 위에 쌓아두도록 했죠. 그런 다음, 그는 회사의 중역들을 소집했습니다.

중역들은 산더미 같이 쌓인 장갑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장갑에 달린 각기 다른 가격표를 보고 회사의 구매 프로세스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곧바로 이해하게 됐죠. '도대체 왜 이렇게 엉망으로 관리해 온 거야?'라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중역도 있었습니다. 

중역들은 자연스럽게 무엇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고치지 않고는 못배겼죠. 결과적으로 이런 공감대가 형성된 덕택에 그 회사는 구매 프로세스를 개선함으로써 막대한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존 코터와 댄 코언이 함께 쓴 '변화의 기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스태그너입니다.

만일 그가 복잡한 데이터로 구성된 두툼한 보고서를 통해 회사의 구매 관행이 잘못됐음을 주장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누군가는 그 보고서를 보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겠지만, 그랬다고 해도 변화의 공감대는 형성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변화하자고 외치는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책임 회피 때문에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9.11 사태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피터 슈워츠는 사태가 발발하기 7개월 전인 2001년 2월에 조지 부시 대통령을 알현한 자리에서 두툼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부시는 대충 훑어보다가 딕 체니 부통령에게 '당신이 대신 읽으시오'라고 했답니다. 체니도 머리가 아팠는지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피터 슈워츠의 보고서를 읽어봤다면 9.11 사태를 미연에 방지했거나 사고가 터진 후에 신속히 대처했을지 모릅니다.

피터 슈워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 사실을 인터뷰 때 밝혔는데요, 사실 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두툼한 보고서를 주는 바람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부시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과오를 생각한다면, 9.11 사태를 예견했다는 명성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두툼한 보고서 대신에 '장갑'과 같은 사례 하나로 부시를 움직였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뇌 속에는 감정을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가 숨어있습니다. 인간이 파충류로부터 진화해 온 까닭입니다. 파충류의 뇌에 속삭이는 메시지가 변화의 의지를 발화하고 유지하며 그 속도를 가속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성에 호소하는 메시지는 생명력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면, 두툼한 보고서를 내던지고 여러분만의 '장갑'을 발견하십시오. 두툼한 보고서는 베개로나 쓰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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