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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을 하다보면 갑작스럽게 외형이 성장한 회사를 가끔 만난다. 이런 회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개인 또는 가족기업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관련 분야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외형이 갑작스레 커진 회사이다. 두 번째 유형은 90년대 말 벤처기업으로 시작하여 호황기와 몰락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회사로서, 기술력을 통해 기하급수적인 성공을 구가하는 몇몇 첨단 분야의 기업들이다.
유형이야 어찌됐건 그들의 고민은 대개 비슷하다. 바로 ‘경영시스템의 부재’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영시스템이란, 경영요소의 체계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경영시스템의 맨 꼭대기에는 회사의 미션과 비전이 자리 잡는다. 즉, 회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방향이 설정돼야 한다. 그리고 비전과 미션을 달성케 하는 방법론으로서 전략이 존재해야 하며, 전략의 실행은 조직, 사람, 프로세스에 의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IT시스템, 규정 등 인프라를 갖춰서 경영시스템을 완성해야 한다.
기술의 우위, 제품의 차별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지 모르나 그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핵심역량이 "보편역량'으로 변하면서 성장은 꺾이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경영자들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를 원한다. 그동안 돈을 좀 벌었으니 투자하여 제2의 도약을 일굴 만한 아이템을 찾기 시작한다. Hanmail로 유명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이 포털사업의 한계를 느끼고 온라인보험과 같은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전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일단 그러한 아이템을 찾아내기가 꽤나 어렵다. 혁신적인 사고와 열린 눈을 가지지 않으면, 남들이 다 하는 사업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아이템을 찾은 이후에 그것을 뒷받침할 경영시스템이 부재해서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는 데 있다. 조직이 갖춰지지 않고, 수행할 사람이 없고, 인프라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개인기업이나 벤처기업 시절에 잘 먹혔던 관리체계가 외형이 커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배고프던 시절의 향수를 기억하는 자수성가형 CEO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이 챙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즉흥적으로 의사결정 내리는 습관에 빠진다. 게다가 CEO가 빠져버리면 임원이나 관리자들이 아무것도 의사결정 내리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더 큰 문제다. CEO가 조직성장의 크리티컬 포인트이면서 동시에 보틀넥(Bottle Neck)이 되는 모순적인 상황 하에서는 제2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제2의 성장은 CEO와 조직 구성원들의 공감과 동참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성장을 CEO가 만들어 냈다면, 새로운 성장은 조직 전체가 움직여야만 도달 가능하다. 이를 위해 조기에 경영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훌쩍 커버린 청소년이 아직까지 유아복을 입는다면 응당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혀야 한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사춘기에 ‘2차 성징’을 겪는 이유도 커지는 몸에 맞게 호르몬 분비체계를 재조정하는 과정 때문이다. 기업도 커져가는 몸집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이 같은 ‘성장통’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경영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할까? 흔히 새로운 부서를 추가하거나 세분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작업을 경영시스템 구축의 출발점으로 잘못 이해한다. 예를 들어, 총무팀에서 인사업무, 기획업무, 총무업무를 맡아 수행했다면 인사팀, 기획팀, 총무팀으로 분화하고 각 팀에 팀장을 임명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매출규모가 커졌으니 사람도 많이 뽑아야 하고 조직의 크기도 함께 키워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경영시스템 구축을 인력과 조직의 확대로 오인할 경우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관료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소규모 조직의 장점인 빠른 의사결정력이 급격히 둔화되고 불필요한 의사결정단계가 이중삼중 추가되기 쉽다. 인사팀, 기획팀, 총무팀으로 분화시켰다면 이들을 총괄할 경영관리 본부장 직위를 신설하고 싶어진다. 과거엔 CEO에게 바로 올라갔던 사안이 경영관리 본부장의 존재로 인해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사안의 내용이 왜곡되는 ‘옥상옥’의 폐해가 발생되기 시작한다. 몸집은 어른 만큼 커진 고등학생에게 어른에게나 어울릴 법한 양복을 입히면 ‘애늙은이’로 보이듯이, 관료화는 조직을 조로(早老)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둘째, 조직 분위기의 혼란을 야기한다. 조직의 물리적인 크기를 확대하려면 아무래도 내부인력의 승진을 통한 충원보다는 외부로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외부인력을 찾아 앉히는 방법이 비용편익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인력과 새로 영입된 인력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을 간과하기 쉽다. 다 그렇지 않지만, 영입된 인력들 몇몇은 ‘뜨내기’처럼 행동한다. 거쳐 가는 경력의 일부로 현 직장을 간주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들이 관리자가 되면 단기 성과만을 챙기는 과정에서 기존직원과 마찰을 빚는다. 급기야 신진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대립으로 비화된다. 그들은 보통 체계가 잘 잡힌 큰 회사 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체계가 미약한 현 조직을 깎아내리는 통에 조직 분위기가 흐려진다. 이를 경계하자.
경영시스템의 체계를 잘 갖추려면, 신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조직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에 연연하지 않고 경영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조직이 나아가야 할 비전과 미션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조직, 사람, 프로세스, 인프라를 어떻게 정렬(Alignment)할지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너무 급히 하면 곤란하다. 꿰었던 단추를 다시 풀 위험이 있으니까.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 전쟁 중에 하노이 힐턴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미국의 장교 짐 스톡데일 장군의 이름을 딴 말이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수용돼 있으면서 4년간의 독방 생활과 수십 차례의 모진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전쟁포로를 보호하기 위해 체결된 제네바 협약은 그곳에서 무의미한 선언에 불과했다. 포로로서의 권리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정해진 석방 날짜 없이 끝도 모를 전쟁을 이겨내야 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포로 생활 중에 숨을 거뒀지만, 그는 미국의 장성으로서는 유일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생환의 비밀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음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풀려날 희망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으며, 결국에는 빠져나와서 나중에 그 끔찍한 경험을 내 생의 전기로 전환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낙관주의자들은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오면 나갈 수 있을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버리면 부활절이 오면 나갈 수 있겠지,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상심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갔습니다.”
비전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우리는 보통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좋은 것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 잘 될 거야. 좋은 날이 올 거야.” 라며 위로하지만 결국 이러한 말은 오히려 현실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변치 않을 운명으로 굳어 버리게 만들고 현실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영원히 꺾게 만들 수도 있다. 상상만으로 좋은 날은 오지 않는다. 스톡데일이 참담한 상황을 이기고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근거 없는 희망을 버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단기적인 목표를 끊임없이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 낸 것에 있다.
이처럼 비전이란 멋들어진 몇 마디의 문구로 꾸민 장밋빛 미래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낙관주의로 비전을 치장해서는 안 된다. 스톡데일의 사례처럼, 올바른 비전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노력으로 달성이 가능한 미래를 설정하도록 한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비전은 원칙을 제시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생애 동안 무수한 난관에 접한다. 비전은 우리에게 가능한 한 그러한 난관에 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난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려주기 위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경기 추락으로 매출과 이익이 급감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때 우리 회사의 비전 선언서를 들춰보라. 가격을 낮춰라, 공급업체를 바꿔라, 등등 당장에 실행할 묘책은 분명 그곳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전에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준수해 가야 할 원칙이 명기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델타 항공의 비전은 ‘세계인의 항공사로 선택 받는다.’ 라는 아주 짧은 말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함의되어 있다. ‘세계인의...’ 라는 문구에는 적극적인 신규노선의 개척과 타 항공사와의 제휴 영업이라는 사업의 방향이, ‘항공사로...’ 에는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항공 수송이라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 투자할 것이라는 의지가, ‘선택 받는다...’ 에는 고객, 주주, 사원들에게 선택 받을 수 있도록 탁월한 서비스, 높은 투자수익, 성과지향의 근무환경을 제공하겠다는 목표가 숨어 있는 것이다.
비전은 행동에 몰입하도록 한다. ‘쇼생크 탈출’ 이란 영화에서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가석방되어 나올 감방 동료에게 돌 밑에 숨겨 둔 쪽지로 말했듯, 물론 ‘희망이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탈출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매일 실천에 옮겼다는 것에 있다. 그의 희망은 본인의 억울함이 알려져 언젠가는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결코 아니었다.
영화의 압권은 속임수를 당한 교도소장이 반쯤 닳아 없어진 숟가락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희망이란 매일매일 조금씩 숟가락으로 벽을 파내는 것이었다. 비전의 힘은 우리를 경쟁자로부터 구별 짓게 하는 맨 밑바닥의 동력, 바로 숟가락으로 벽을 파도록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때때로 비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사방이 깜깜한 한밤중에 길을 갈 때 가장 반가운 것은 무엇일까? 손에 들고 있는 랜턴일까? 아니다. 그것은 겨우 발밑만 비춰줄 뿐이다. 가장 반갑고 고마운 것은 바로 저 멀리 보이는 민가의 불빛이다. 비전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절실한 것이다. 절망을 추스르고 어둠 속을 헤쳐가게 하여, 결국은 우리를 살리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