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하나가 한 사람을 파멸시키다   

2011. 9. 6. 10:05



1986년 10월 초,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재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보스톤 레드삭스와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시리즈 5차전이 열렸습니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면 에인절스가 아메리칸 리그를 우승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9회초 현재 스코어가 5 대 2로 앞선 상태라서 우승은 바로 코 앞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3점 차이는 레드삭스가 뒤집기 어려운 듯 보였지요.

하지만 레드삭스는 막판까지 힘을 쏟으면서 5 대 4까지 점수차를 줄였습니다. 9회초 투아웃에 1루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감독인 진 마우치는 마무리 전문 투수인 도니 무어(Donnie Moore)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무어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습니다.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면 경기가 종료되고 에인절스는 우승과 함께 월드 시리즈로 가는 티켓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나 그가 던진 마지막 공은 데이브 핸더슨(Dave Hendersen)의 방망이에 맞았고, 그 공은 좌측 담당을 뛰어넘고 말았습니다. 홈런이었죠. 5 대 4였던 점수가 5 대 6으로 역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어는 망연자실한 채 베이스를 달리는 핸더슨을 바라봐야만 했죠. 에인절스는 (하지 않아도 될 뻔 했던) 9회말 공격에 나서서 경기를 다시 역전시키려 했으나 힘이 빠진 나머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레드삭스가 아메리칸 리그의 챔피언이 되고 월드 시리즈 행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무어는 오랫동안 자신이 던진 마지막 공을 곱씹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던지지만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에 허덕였죠. 언론들도 무어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모든 패배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형국이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끄집어내어 무어를 조롱했습니다. 1986년에 21 세이브를 기록하던 성적은 1987년이 되자 5 세이브로 급격히 저조해졌습니다. 성적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도 피폐해져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죠.

결국 무어는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고 급기야 1989년 7월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자살소식을 알리는 기사에는 그가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부인을 총으로 여러 차례 쐈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결국 공 하나가 게임을 망쳤고 개인의 삶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도니 무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도니 무어의 사례를 보고 '자신의 실패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런 자기 반성이 구체적인 실천과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자기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겠지요. 요컨대, 그런 상황을 개인 스스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겁니다. 

또한 실패를 잘 이겨내고 오히려 실패를 즐기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실패를 웃으며 털어내지 못하는 자들을 은근 비웃기도 하겠죠. 장방 드 벨드(Jean Van de Velde)라는 골프선수는 1999년에 열린 브리티시 오픈에서 17번 홀까지 2위를 3타 차이로 따돌리면서 이변이 없는 한 우승이 확실시됐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18번 홀에서 그만 트리블 보기를 범하는 바람에 연장전에 돌입했고 결국 힘이 빠진 그는 폴 로리에 우승컵을 넘겨주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크게 회자되자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즐겼습니다. 그 게임은 그저 자신의 골프 인생 중에 한 페이지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과거 속에 살지 않는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죠.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이런 그의 긍정적 사고를 치하하면서 개인의 강건한 마음가짐이 실패를 이겨내고 더 나은 성공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할 겁니다.

하지만 무어의 비극적 결말을 무어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상황을 나아지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행을 계속 생산해낼지 모릅니다. 물론 무어 자신의 나약한 심성도 문제이겠지만, '바로 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런 실패를 하고 말았어, 이 멍청아!'라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의 부정적 메커니즘, 게임을 그저 게임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단한 지상목표로 여기는 광적인 스포츠 팬덤 현상, 실패한 사람을 찍어 누름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야릇한 경쟁의식 등이 무어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A매치 축구경기에서 우리팀이 패배하면, '저 자식 때문에 다 이긴 경기를 지고 말았어!', '쟤가 잘 막았더라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등 온갖 비난이 경기 관람을 끝낸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물론 경기에 진 속상함을 그렇게 푼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죠. 하지만 그 비난의 대상이 된 선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실수하고 잘못한 점을 깨달으며 반성할 겁니다. 비난이 가벼운 불평 정도에서 끝나야지, '확대하고 꼬치꼬치 분석해서'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몇날 며칠 우려먹는 언론과 '유사언론(블로그 등)'은 자신들의 거친 입이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음을 한번쯤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몇몇 블로그를 보면,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의 잘못된 점을 세세하게 지적하면서 '계속 그러다가는 망하고 만다'는 식의 글들이 올라오고, 그런 자극적인 글들은 높은 조회수와 추천수를 기록합니다. 연예인 자신도 아니면서 어쩜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아는지 놀라울(?) 정도죠.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주 '극적인' 순간에 '뼈아픈' 실수를 저지릅니다. 싸구려 언론과 싸구려 '입'들은 그런 사람들의 실패를 이용하는 데에 자신들의 재능 있는 글발과 말발을 세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실패를 감싸안는 분위기가 실패를 이용하는 분위기보다 우세한 건강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말입니다.

공 하나가 한 사람을 파멸시켰습니다. 아니, 공 하나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개인에게 큰 책임을 부여한 사회가 한 사람을 파멸시켰다고 해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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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을 조장하고 실수를 권장하라   

2011. 7. 14. 09:00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엄청나게 내리고 바람까지 세게 몰아친다. 여러분은 잠시 고민한다. ‘오늘은 집에서 쉴까?’ 산업심리학자 프랭크 스미스가 시카고에 있는 시어스 직원들을 대상으로 근무만족도를 연구하던 중에 강력한 눈폭풍이 몰아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그날 근무만족도가 낮은 부서의 출근율은 37%였지만 만족도가 높은 부서의 출근율은 97%나 됨을 발견했다. 만족하는 직원일수록 조직에 자발적으로 기여한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악천후처럼 추가적인 수고가 요구될 때 직원들이 보이는 반응은 그들의 업무 몰입도를 측정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다. 그들을 업무에 몰입시키고 조직문화를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신성한 암소를 쫓아내야 한다. 비스마르크가 러시아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러시아 황제를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정원의 한적한 곳에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기까지 꼬박 3일이나 걸렸다. 80년 전 캐더린 대제가 언 땅을 뚫고 나온 꽃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나머지 경비병을 시켜서 누구도 그 꽃을 꺾지 못하도록 명령했던 것이 시초였다. 그 이후로 아무도 왜 근무를 서는지 의심하지 않은 채 80년이나 흘렀다.
 
이렇게 유래를 모르는 관행들이 도로 한복판에 누워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는 ‘신성한 암소’이다. 신성한 암소 때문에 직원들은 일하는 이유조차 모른 채 타성에 젖는다. 변화는 거창한 로드맵이 아니다. 오래된 신성한 암소를 찾아내어 한 놈씩 쫓아내는 일이 타성에 빠진 조직을 건져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둘째, 협력을 조장해야 한다.  리 로스는 피실험자들 중 한 그룹에게는 동일한 게임의 이름을 ‘커뮤니티 게임’이라고 알려주고, 다른 그룹에겐 ‘월스트리트 게임’이라고 알려줬다. 두 그룹의 게임 결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커뮤니티 게임이라는 말을 듣고 게임에 임한 학생들이 훨씬 협조적이고 최종적인 보상의 크기도 컸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걸까?  커뮤니티 게임이란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게 되어 무의식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 반대로 '월스트리트 게임'이란 이름을 들은 피실험자들은 증권시장을 연상하면서 약육강식의 프레임으로 게임에 임한다. 로스의 실험은 업무 몰입과 조직성과에 협력적인 조직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협력적인 문화를 창출할까? 
 
심리학자 린다 캐포랠은 일종의 ‘기부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10분간 이야기를 나누며 안면을 트면 무임승차자가 줄고 게임 성과가 높아짐을 밝혔다. 협력은 신뢰가 바탕이 되고, 신뢰는 원활한 의사소통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협력을 공고히 하려면 순환보직을 적절히 활용하거나 다른 직무를 수행할 기회를 일부러 만드는 것이 좋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임원들이 공항 카운터에서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일을 즐기듯이 말이다. 또한 파티션을 없애거나 낮춰서 직원들 사이의 물리적인 장벽을 없애는 일도 직원 간의 협력을 도모하는 작은 장치가 될 수 있다.
 
셋째, 실수를 떠들어 댈 수 있어야 한다. 에이미 에드먼슨은 8개 병동을 대상으로 투약 실수를 조사했다. 그녀는 최고의 병동일수록 투약 실수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병동 관리자의 능력과 리더십이 긍정적일수록 투약 실수가 더 많았다. 추가로 분석하니 투약 실수가 많은 이유는 실력이 떨어지고 병동의 근무 분위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실수를 드러내고 실수를 통해 학습하려는 의료진들의 자발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반대로 투약 실수가 적은 병동은 실수를 보고하면  질타 받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급적 실수를 감췄다. 이처럼 실수를 감추게 만드는 조직일수록 직원들은 업무에 진정으로 몰입하지 못한다. 실수를 용인하고 마음껏 떠들어댈 수 있는 분위기가 업무의 신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단합대회나 회식 같은 이벤트로 조직문화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런 방법은 구린내가 나는 문제를 모래로 살짝 덮는 것에 불과하다. 신성한 암소떼를 몰아내고 협력을 조장하며 실수를 마음껏 떠들 수 있어야 직원들은 업무를 사랑하고 그것에 몰입할 것이다. 더불어 조직의 성과는 저절로 오를 것이다.

(*모 회사 사보에 실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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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조직은 위험하다   

2011. 5. 24. 09:30



두 개의 병원이 있습니다. 한곳은 투약 과정에서 실수가 거의 없는 곳이고 다른 한곳은 100배나 많은 투약 실수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두곳 중 한곳을 택해 입원해야 한다면 어떤 병원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전자를 택할 겁니다. 투약 실수가 적다는 것은 의사와 간호사의 실력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이러한 통념이 옳은지를 밝히기 위해  한 대학병원(하버드 의대 소속)에 딸린 8개 병동을 대상으로 일련의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 병동들은 모두 인력 구성, 전문성, 업무량 등에서 비슷했습니다. 그녀는 4가지 유형의 투약 실수(피할 수 있는 실수, 피치 못할 실수, 잠재적인 실수, 중간에 바로잡혀진 실수)를 종속변수로 설정하여 6개월 동안 면밀하게 모니터링을 실시했습니다. 그런 다음,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서 의료진의 리더십, 업무지시능력, 팀워크, 치료 성과, 직원들의 근무 만족도 등을 폭넓게 조사했죠.



그녀는 사전에 의료진의 실력이 좋을수록, 팀워크가 좋을수록, 만족도가 높을수록, 병동의 분위기가 우호적일수록 모든 유형의 투약 실수가 적을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이 연구에 임했습니다. 즉 최고의 병동일수록 실수가 적으리라 예상했죠.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의사들의 차트를 분석하고 불시에 방문해서 살펴본 결과, 최고의 병동일수록 투약 실수가 더 많이 발견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왔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수간호사들의 업무지시능력과 투약 실수 건수와의 상관계수가 0.74이 나왔고, 나머지 독립변수에 대해서도 0.7 이상의 상관계수가 측정되었습니다. 참 이상한 결과였죠. 병동 관리자의 능력과 리더십이 긍정적일수록 투약 실수가 더 많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에드먼슨은 추가 분석을 통해 이런 아이러니를 설명했습니다. 실수를 드러내고 실수를 보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연시하는 병동일수록 기록된 투약 실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죠. 즉, 겉으로 보기에 투약 실수가 많은 것은 실력이 떨어지고 병동의 근무 분위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실수를 드러내고 실수를 통해 학습하려는 의료진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문화 때문임을 알아냈습니다. 반대로 투약 실수가 적은 병동은 누군가가 실수를 보고하면 질타 받거나 징계 받는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가급적이면 실수를 감추려는 동기가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실수를 드러내지 않고 억압하려는 문화는 의료진의 치료 성과와 근무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이유가 됐으리라고 에드먼스는 추측했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용인하고 장려하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자주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실수가 '능력 없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실수는 나쁜 것이고 저지르지 말아야 할 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기업에서는 관리자들이 부하직원들이 실수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조용히 덮으려는 동기가 강합니다. 겉으로 드러내면 상위 관리자(예 : 임원)에 자신과 그 부하직원이 '찍힐'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부하직원을 따로 불러 호되게 야단친 후에 조용히 문제를 위장하거나 피해가려고 조치하죠.

이렇게 되면 문제를 일으킨 부하직원은 실수를 통해 뭔가를 학습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학습의 결과가 전파되지 못합니다. 또한 부하직원이 실수를 다시 저질렀다면 혼날 것을 염려해 보고하지 않고 자신이 처리하려 들겠죠. 겉으로 보기엔 실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완전무결한 조직이 알고보면 문제투성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직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상 크고 작은 실수가 생기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실수와 문제가 없는 조직일수록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시끄러울 정도로 실수를 드러내고 지적하는 조직이 조용한 조직보다 성과가 높을뿐더러 오래 갑니다. 그런 조직은 실수를 환경에 적응해 가는 '진화'의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직의 건강성은 무결점의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그것을 고쳐 나가려는 동적인 과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조용한 조직은 성과를 높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조직입니다. 조용한 조직은 성과 향상은 기대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적응'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조용한 조직은 위험한 조직입니다. 그들은 억누르고 있는 실수가 언제 큰 파국으로 번질지 모릅니다. 

공자는 말했습니다. "지혜란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 말은 실수는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수단이자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실수를 용인하고 권장한다는 말이 더 이상 듣기 좋은 구호로 끝나지 않도록 실천에 옮기는 일이 지혜로운 경영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조용한가요, 아니면 시끄러운가요?

(*참고논문 : Learning from mistakes is easier said than d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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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失手)를 논하다   

2009. 10. 25. 01:40

* '실수(失手)'를 주제로 트위터에 연속적으로 올린 글을 모아 봤습니다.
트위터에 올린 원래의 글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1. 사람들은 흔히 "실수를 통해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가 실수하면 "무능하다"고 비난부터 한다.

2. 실수를 저지르면 '자기정당화'의 프로세스가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관중석에서 레이저를 쏴서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그래서 실수를 통해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3. 실수를 통해 배우려면 그걸 여러 번 재생하며 복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되도록 빨리 실수를 털어내려고 한다. 

4. 실수를 통해 배우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이 실수는 바로 내가 저질렀다"라고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5.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같이 똑똑한 사람이 실수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 

6. 남의 실수를 지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기정당화로 똘똘 뭉친 상대방이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물론, 당신을 증오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7. 다른 사람의 실수를 지적할 때 "넌 도대체 왜 그 모양이냐?"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자기정당화의 벽을 쌓는다. 그리고 절대 실수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 

8. 타인의 실수를 잘 지적하고 깨닫게 하려면 그 사람 자체의 기질, 성격, 학력 등 귀인적 요소를 절대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실수하게 된 "상황"을 지적해야 한다. 

9. 타자가 10번 중 3번만 안타를 쳐도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어쩌면 9할 이상의 타율을 요구 받는 세상에서 산다. 실수가 곧 죄악이 돼버린 세상인 셈이다. 

10. 실수는 미련하고 못났다는 증거가 아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증거다. 

11.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집단은 권력집단이다. 첫째, 위신이 깎이는 게 두려워서. 둘째, '위대한 자신'들은 절대 실수할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12. 존 F. 케네디 "실수의 책임은 나에게, 그리고 나에게만 있다"고 말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내가 직접 잘못한 것은 없지만, 내 임기 중의 일이니 책임은 지겠다"고 말했다. 누가 위대한가? 

13. 실수를 인정하고 뉘우치면 자신의 권위가 추락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고 뉘우친 자에게 명예라는 왕관을 씌워준다. 

14.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기억을 왜곡한다. 이것이 개인이나 국가에게 닥칠 불행의 씨앗이다. 조지 W.부시는 아직까지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15.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 1 : "척 보면 안다구" 또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알아?"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 

16.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 2 : 다른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면 비난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17.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 3 : 그들은 대개 수동태 문장을 쓰거나 3인칭 주어를 자주 사용한다. 반면 실수를 통해 잘 배우는 사람은 대개 1인칭의 능동태 문장을 쓴다.

18.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 4 : 실수에 대한 변명으로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난 내 감정에 충실했다고" 등 자신의 선천적 기질에 핑계를 돌린다. 

19. "역사는 승자가 쓰지만, 회고록은 패자가 쓴다"는 말이 있다.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승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20. 실수나 착오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고 괴롭힌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해도 싸다"고 말해야 실수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실수를 덮으려고 점점 무모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크게 성공하면 지난 번 실수를 지워버릴 수 있을 거야"라면서. 

22. 성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23. 실수하지 않는 인생보다 실수를 인정하고 배우는 인생이 아릅답고 위대하다.


여러분 실수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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