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쥐는 왜 꼼짝하지 않을까?   

2011. 12. 16. 11:40



여기에 쥐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쥐를 길다랗고 좁은 길 위의 한쪽 끝에 놓습니다. 쥐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길은 바닥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길의 반대편 끝에 먹이를 놓아 둡니다(아래의 그림 참조). 

A --------------------------- B
(쥐)                                        (먹이)

그러면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그 쥐는 좁은 길을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길 끝에 있는 먹이를 취하겠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보통의 쥐는 특이한 조건(배가 엄청나게 부르거나 아프거나)이 아니라면 대개 그렇게 행동합니다. 

헌데, 실험조건을 아래와 같이 조금 바꿔 보면 쥐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A --------------------------- B
(쥐)                                     (전기충격)

먹이가 위치했던 곳에 전기충격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쥐는 멋도 모르고 좁은 길을 달려가다가 B 위치에서 강한 전기충격을 느끼겠죠.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불쾌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겁니다. 그래서 B는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점을 학습하겠죠. 그래서 A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을 보일 겁니다.



이제 위의 두 실험조건을 하나로 합쳐보겠습니다. 아래와 같이 먹이와 전기충격 장치를 B 위치에 같이 놓으면, 이 불쌍한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A --------------------------- B
(쥐)                                     (먹이 & 전기충격)

이 쥐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픈 상태입니다. 그래서 B에서 솔솔 풍겨져 나오는 먹이 냄새로 인해 배고픔이 더욱 가중되겠죠. 하지만 이미 B에 가면 상당히 기분 나쁜 전기충격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쥐는 먹이를 향해 조금 다가가다가 좁은 길 위의 어느 지점에 머물며 먹이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상황을 연출하겠죠.

B쪽으로 갈수록 먹이의 유혹이 커져서 B쪽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B쪽으로 갈수록 전기충격의 '악몽'이 더욱 생생해져서 B로부터 멀리하려는 욕망이 균형을 이루는 위치에서 쥐는 걸음을 멈출 겁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쥐는 그 위치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쥐의 욕망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전기충격을 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가 '먹이에 접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보다 더 큽니다. 그 이유는 대개의 동물이 생존을 위해 일단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생명에 지장을 줄 거라 여기는 것)에 더 큰 가중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닐 밀러(Neal Miller)라는 심리학자가 1944년에 수행한 고전적인 실험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두 개의 동기가 충돌하는 갈등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었죠. 닐 밀러는 음식에 접근하고자는 동기와 전기충격을 회피하고 싶은 동기 사이의 갈등을 '접근-회피 갈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어떤 대상에게로 다가가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때 겪는 갈등을 말합니다. 

인간도 수없이 다양한 '접근-회피 갈등' 상황에 놓입니다. 이 '접근-회피 갈등'이 조직 운영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조직의 리더들은 구성원들이 뭔가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하기를 기대합니다. 좀더 획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도하기를 원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독려합니다.

하지만 많은 도전들은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지만 그 성공확률은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 얻게 되는 손실과 도전 과정에서 소요된 돈, 시간, 인력 등이 시도하지 않았으면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으로 인식됩니다. 그 바람에 도전에 실패하면 도전을 독려할 때와는 판이하게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집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자를 찾고 그 사람을 희생양 삼으려는 사태까지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나중에 생길 또다른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의 불쌍한 쥐가 겪었던 '접근-회피 갈등'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뭔가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비난과 벌을 받았던 경험이 있을때, 실패한 다른 도전자의 말로를 직접 보고 들을 때, 조직이 실패에 '필벌'하는 문화가 강할 때, 어느 누구도 선뜻 도전의 열매를 취하려 발벗고 나서기가 힘들 겁니다. 비록 그 도전을 성공리에 마쳤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회사는 실패를 너그러이 용인한다' 혹은 '실패를 장려한다'라며 외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질 않는다', '직원들은 도전정신이 없다'며 한탄하는 '입'들을 자주 만납니다. 도전에 성공하면 나름 괜찮은 금전적, 비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도 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알아서 착착 하지 않는지 답답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업들은 진짜로 실패를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먹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더 큰 '전기충격' 장치를 함께 가져다 놓고서 직원들에게 그곳으로 달려가라 명하는 것이 과연 먹힐지, 그렇게 명하는 자기 자신은 그곳으로 달려갈 용기가 진짜로 있는지 자문하고 자답해야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업무 수행을 잘 하려다가 몇 천만 원 가량의 손실을 회사에 끼쳤다고 합니다. 그 분의 상사가 괜찮다면서 자신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노라고 다독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어떻습니까? 진짜로 실패를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척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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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하나가 한 사람을 파멸시키다   

2011. 9. 6. 10:05



1986년 10월 초,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재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보스톤 레드삭스와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시리즈 5차전이 열렸습니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면 에인절스가 아메리칸 리그를 우승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9회초 현재 스코어가 5 대 2로 앞선 상태라서 우승은 바로 코 앞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3점 차이는 레드삭스가 뒤집기 어려운 듯 보였지요.

하지만 레드삭스는 막판까지 힘을 쏟으면서 5 대 4까지 점수차를 줄였습니다. 9회초 투아웃에 1루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감독인 진 마우치는 마무리 전문 투수인 도니 무어(Donnie Moore)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무어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습니다.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면 경기가 종료되고 에인절스는 우승과 함께 월드 시리즈로 가는 티켓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나 그가 던진 마지막 공은 데이브 핸더슨(Dave Hendersen)의 방망이에 맞았고, 그 공은 좌측 담당을 뛰어넘고 말았습니다. 홈런이었죠. 5 대 4였던 점수가 5 대 6으로 역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어는 망연자실한 채 베이스를 달리는 핸더슨을 바라봐야만 했죠. 에인절스는 (하지 않아도 될 뻔 했던) 9회말 공격에 나서서 경기를 다시 역전시키려 했으나 힘이 빠진 나머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레드삭스가 아메리칸 리그의 챔피언이 되고 월드 시리즈 행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무어는 오랫동안 자신이 던진 마지막 공을 곱씹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던지지만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에 허덕였죠. 언론들도 무어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모든 패배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형국이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끄집어내어 무어를 조롱했습니다. 1986년에 21 세이브를 기록하던 성적은 1987년이 되자 5 세이브로 급격히 저조해졌습니다. 성적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도 피폐해져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죠.

결국 무어는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고 급기야 1989년 7월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자살소식을 알리는 기사에는 그가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부인을 총으로 여러 차례 쐈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결국 공 하나가 게임을 망쳤고 개인의 삶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도니 무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도니 무어의 사례를 보고 '자신의 실패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런 자기 반성이 구체적인 실천과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자기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겠지요. 요컨대, 그런 상황을 개인 스스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겁니다. 

또한 실패를 잘 이겨내고 오히려 실패를 즐기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실패를 웃으며 털어내지 못하는 자들을 은근 비웃기도 하겠죠. 장방 드 벨드(Jean Van de Velde)라는 골프선수는 1999년에 열린 브리티시 오픈에서 17번 홀까지 2위를 3타 차이로 따돌리면서 이변이 없는 한 우승이 확실시됐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18번 홀에서 그만 트리블 보기를 범하는 바람에 연장전에 돌입했고 결국 힘이 빠진 그는 폴 로리에 우승컵을 넘겨주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크게 회자되자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즐겼습니다. 그 게임은 그저 자신의 골프 인생 중에 한 페이지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과거 속에 살지 않는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죠.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이런 그의 긍정적 사고를 치하하면서 개인의 강건한 마음가짐이 실패를 이겨내고 더 나은 성공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할 겁니다.

하지만 무어의 비극적 결말을 무어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상황을 나아지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행을 계속 생산해낼지 모릅니다. 물론 무어 자신의 나약한 심성도 문제이겠지만, '바로 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런 실패를 하고 말았어, 이 멍청아!'라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의 부정적 메커니즘, 게임을 그저 게임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단한 지상목표로 여기는 광적인 스포츠 팬덤 현상, 실패한 사람을 찍어 누름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야릇한 경쟁의식 등이 무어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A매치 축구경기에서 우리팀이 패배하면, '저 자식 때문에 다 이긴 경기를 지고 말았어!', '쟤가 잘 막았더라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등 온갖 비난이 경기 관람을 끝낸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물론 경기에 진 속상함을 그렇게 푼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죠. 하지만 그 비난의 대상이 된 선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실수하고 잘못한 점을 깨달으며 반성할 겁니다. 비난이 가벼운 불평 정도에서 끝나야지, '확대하고 꼬치꼬치 분석해서'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몇날 며칠 우려먹는 언론과 '유사언론(블로그 등)'은 자신들의 거친 입이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음을 한번쯤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몇몇 블로그를 보면,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의 잘못된 점을 세세하게 지적하면서 '계속 그러다가는 망하고 만다'는 식의 글들이 올라오고, 그런 자극적인 글들은 높은 조회수와 추천수를 기록합니다. 연예인 자신도 아니면서 어쩜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아는지 놀라울(?) 정도죠.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주 '극적인' 순간에 '뼈아픈' 실수를 저지릅니다. 싸구려 언론과 싸구려 '입'들은 그런 사람들의 실패를 이용하는 데에 자신들의 재능 있는 글발과 말발을 세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실패를 감싸안는 분위기가 실패를 이용하는 분위기보다 우세한 건강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말입니다.

공 하나가 한 사람을 파멸시켰습니다. 아니, 공 하나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개인에게 큰 책임을 부여한 사회가 한 사람을 파멸시켰다고 해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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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다니는 회사가 '비즈니스 위크', '포브스', '포츈'과 같은 유명한 경영 잡지에 커버 스토리를 장식하며 성공기업으로 소개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회사에 아주 불만이 크지 않는 한, '우리 회사가 이렇게 유명해지다니!' 하며 자부심을 느낄 겁니다. 하지만, 회사 성과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든지 회계 부정과 같은 스캔들에 연루됐다든지 등과 같은 이유로 잡지 표지를 장식한다면 주위에서 '너네 회사 괜찮냐? 망하는 건 아니냐?'란 말을 듣겠거니 하면서 우울할 겁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유명 잡지의 1면에 오르는 영광(혹은 불명예)을 반대로 생각하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커버 스토리에 오른다는 것이 기업의 향후 성과를 '반대로' 알려주는 지표라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즉 '성공기업으로 1면에 오르고 나면 이후의 성과는 추락한다', '불명예스럽게 1면에 오른 이후에는 성과가 올라가거나 적어도 더 이상 추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명 잡지의 표지에 어떤 기업이 어떤 이유로 올라가느냐를 보고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아마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런 속설이 과연 옳을까요? 이런 신화(myth)같은 믿음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까요?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대학에 근무하는 3명의 교수(톰 아놀드, 존 얼, 데이비드 노스)는 이 속설을 통계적으로 검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1983년부터 2002년까지 비즈니스 위크, 포브스, 포츈 지의 1면에 오른 기업들(모두 549개 기업)을 대상으로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먼저 그 기업들을 성공과 실패의 정도에 따라 5개의 카테고리로 나눈 다음, 커버 스토리로 소개된 시점으로부터 전, 후 2년 간(총 4년 간) 주식시장에서의 성과를 따져 봤습니다.

그랬더니 2가지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극적인 성과를 달성하거나 반대로 최악의 성과를 기록한 이후에 경영 잡지의 표지에 등장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당연하겠죠. 경영 잡지들은 뉴스 거리가 될 만한 극적인 사례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두 번째 현상은 '경영 잡지의 표지에 등장했다는 것이 극적인 성과(반대로 최악의 성과)가 이제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다'라는 것입니다. 톰 아놀드 등은 성공기업으로 소개된 이후의 성과는 보잘 것 없거나 추락하고, 실패기업으로 낙인 찍힌 이후에는 극적인 상승은 아니지만 서서히 성과가 나아졌음을 통계로 보여줬습니다.

이로써 증권가에서 떠돌던 속설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음이 실제로 밝혀졌죠. 만약 성과가 추락하는 기업의 주식을 언제 팔아치워야 하는지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 기업이 불명예스럽게 경영 잡지의 표지에 등장했다면 이제 바닥을 쳤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연구자들은 말합니다. 좀더 기다렸다가 주가가 오를 때 파는 게 낫다는 조언이겠죠.

그런데 왜 경영 잡지의 1면에 오른다는 것이 미래 성과를 '반대로' 가리키는 지표가 되는 걸까요? 왜 극적인 성공 후엔 추락이, 한없는 추락 후엔 비상(飛上)이 있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는 기업 구성원들의 심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공이 자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성공의 저주', 그리고 실패하고 나서야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게 된다는 '실패의 쓴 약'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04년에 '순이익 100억 달러 클럽'에 가입하고 난 직후 순이익은 다시 1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기업으로 소개되자마자 요즘 주춤한 상태입니다. 작년과 재작년에 구글과 관련된 책들이 봇물처럼 나오더니 요즘 구글은 페이스북에 밀리는 형국입니다. 요새 주목 받는 페이스북도 언제 추락할지 아무도 모르죠.

극적인 성공은 독약과도 같습니다.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서는 일. 이것이 성공의 저주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또한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말고 실패를 도약의 기회로 삼는 것이 실패로부터 빨리 빠져나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진부한 조언이지만 이 말만큼 진리인 것도 없습니다.

(*참고논문 :http://www.cfapubs.org/doi/pdf/10.2469/faj.v63.n2.4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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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더 나은 실패'를 위해   

2010. 12. 16. 09:00



어떤 학생에게 배리 매닐로가 그려져 있어 보기에 민망한 티셔츠를 입게 한 후에 다른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이 실험을 진행한 길로비치는 적어도 50%의 학생들이 그 학생이 입은 티셔츠를 알아볼 거라고 추정했죠. 그러나 겨우 23%의 학생들만이 그 티셔츠를 알아차렸습니다. 여러 종류의 티셔츠(남루한 것, 촌스러운 것 등)를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타인은 여러분의 결점에 별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가져도 금방 잊어 버린다는 점을 실험 결과가 말해줍니다. 타인은 여러분의 실패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크고 작은 실패를 겪을 때마다 '잘 할 수 있었는데 난 왜 이리 못낳을까?'라며 자신을 꾸짖습니다. 이런 자책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자신에게서 끝나면 좋으련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상상하기 때문에 패배감에 젖고 말죠.


여러분은 실패라는 말을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가 그려집니까? '실패는 곧 좌절', 이런 이미지는 아닙니까?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을 쓴 사무엘 베케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세련되게 실패했다." 실패는 성공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좀더 세련되게 만드는 방법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기회라는 뜻입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해럴드 크로토는 "열 번의 실험 중에 아홉 번을 실패했다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좋은 기록이다"라고 말하며 실패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라고 충고합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완벽을 고집하면, 성공에 거의 다다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 언저리에서 중단하고 만다는 의미가 숨어있는 말입니다.

실패는 오로지 초라한 것이고 성공은 영광스러운 것일까요? 이탈리아의 리빙 용품 제조사인 알레시의 CEO 알베르토 알레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매년 출시하는 제품 중에 실패한 것이 1건도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그는 모든 성공이 실패한 경험과 환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실패는 성공은 언제나 함께 가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작가 매들린 랭글은 실패에 대해 말할 때 성공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시간의 주름'이라는 대표작을 출판하기까지 2년 반 동안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실패가 허락된 유일한 창조물이다. 만일 개미가 그랬다면 죽음 뿐이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도록 허락됐다. 만일 마음 놓고 실패할 수 없다면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는 그것으로부터 배우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이지, 성공하기 위해 쓰고 버리는 1회용 젓가락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부실한 계획, 모자란 능력, 게으름과 낮은 집중력 등과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한계라고 인식하고 분석하면 오히려 실패의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주저앉아 실패의 고통에 매몰된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공의 장애물이 됩니다.

실패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실패를 '성공을 위한 실패'가 아니라 '더 나은 실패'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별개의 개념으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죠. '이번에도 실패했군. 그렇지만 저번 실패보다는 조금 나아졌다'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2010년에 여러분은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그렇다면 2011년엔 '더 나은 실패'를 향해 달려 나가십시오. 성공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실패를 뜻하는 다른 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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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멋진 아이디어를 보고서로 꾸며서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데, 그가 보고서 앞부분에 있는 개요만 읽어보거나, 설명을 하는데 잘 듣지 않고 엉뚱한 페이지만 넘겨 보면서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진 적은 없었습니까? 그가 “이제 그만 됐어’라고 가로막으며 아이디어의 우수함을 칭찬하기보다 그것이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며 문제점만 잔뜩 늘어 놓은 적은 없었습니까? 

만일 상사가 당신을 그렇게 비난했다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절망하여 몇 날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면서 참담한 기분일 겁니다. ‘진짜 내가 능력이 없는 걸까? 내가 이 회사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라며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들은 것 역시 실패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과 절망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모욕적이고 참담한 그 순간에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이 말한 ‘인터뷰 착각(interview illusion)’을 기억해 낸다면 말입니다. 

인터뷰 착각이란, 상사나 면접관들이 지원자(혹은 부하직원)들이 앞으로 일을 잘 할지 못 할지를 평가하는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텍사스 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는 매년 800명의 지원자 중에서 면접시험 점수로 150명을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텍사스 주의회가 갑자기 정원을 50명 더 늘리라고 하는 바람에 면접에서 떨어진 학생들 중에서 50명을 추가로 합격시켰습니다. 로빈 도스(Robyn Dawes)라는 심리학자가 후에 추적을 해보니, 먼저 입학한 학생과 추가로 입학한 학생들 사이에 학업성취도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조사됐지요. 두 그룹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비율은 82%로 동일했고, 우등상을 받은 비율도 비슷했으며, 레지던트 1년차를 이수한 이후의 성과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면접에 소요되는 시간은 지원자가 앞으로 그 분야에 종사할 시간에 비한다면 찰나에 비유될 만큼 매우 짧습니다. ‘척 보면 안다’라고 자신하지만, 평소에 가진 편견, 그날의 컨디션,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 등에 따라 지원자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 내리기도 하고, 당황한 지원자가 말 실수를 하면 뭔가 숨겨진 의미 때문은 아닌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원자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편견에 따라 사람을 뽑는 오류를 종종 범하죠. 11군데의 대형 오케스트라에서 단원을 선발할 때 지원자들이 누군지 모르도록 칸막이 뒤에서 연주하도록 했더니 여성 단원의 합격률이 예전보다 두 배나 뛰어 올랐습니다. 이것은 면접관의 인터뷰 착각이 얼마나 심한지 깨달을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신문이나 책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람 보는 눈’을 자신하는 경영자들이 가끔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IBM의 창업 회장인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인재철학을 과시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실이 정말 어떤지 말하는 반항적이고 고집이 센, 거의 참을 수 없는 타입의 사람들을 항상 고대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있고 우리에게 이들을 참아낼 인내가 있다면 그 기업에 한계란 없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눈이 진짜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위치한 ‘높은 지위와 오랜 경력’이 그에게 사람 보는 눈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옳게 판단 내린 사례만 눈에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게 평가해도, 그들의 ‘눈’은 다른 사람들의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사람 잘 본다고 자신하는 왓슨 같은 경영자도 충분히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왓슨은 1943년에 예언하기를 앞으로 컴퓨터는 기껏해야 전 세계를 통틀어 한 해에 다섯 대 이상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경영의 귀재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사람을 보는 데 있어 그도 실수가 없었을까요?

누군가가 여러분을 비난하는 말에 상처 받지 마십시오. 그런 메시지는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메시지의 옳고 그름은 그들이 판단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은 여러분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이것이 비난이나 평가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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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2008. 7. 10. 12:32

우리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흔히 말한다. 또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생각하라'고 여러 현자들은 이야기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을 각각 열 번씩 되뇌어 보라. 실패와 성공 중에 어떤 단어에 힘이 들어가는가? 아마 성공에 악센트를 두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은연 중에 풍기는 뉘앙스로 볼 때, 의도와는 달리 실패 자체보다는 성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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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출처 : 네이버)

이 격언들 때문에 저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공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연상된다면 우리는 더 초라해지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성공을 위한 실패'를 강조하는 이런 충고들은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임을 더 각인시키고 성공과 실패 사이의 괴리를 더욱 크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을 달성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실패했구나. 언제쯤 그걸 이룰 수 있을까?'란 생각 때문에 절망감만 더욱 키운다.

실패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실패를 '성공을 위한 실패'가 아니라 '더 나은 실패'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별개의 개념으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했군. 그렇지만 저번 실패보다는 조금 나아졌으니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지금의 실패보다 '더 나은 실패'를 위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을 쓴 사무엘 베케트가 "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세련되게 실패했다"라고 말했던가? 실패는 성공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좀더 세련되게 만들어가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실패 = 인생을 좀더 세련되도록 만드는 과정


성공은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는 결코 아니다. 어제의 실패가 어제보다 나은 방법으로 오늘을 대하도록 하고, 오늘의 실패가 오늘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내일을 만들어 가도록 이끌면, 그 과정에서 성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실패하는 과정 중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실패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죄처럼 느껴지고 그토록 원하는 성공의 언저리에서 무너지고 만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해럴드 크로토(Harold Kroto)는 "열 번의 실험 중에 아홉 번을 실패했다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좋은 기록이다"라고 말하며 실패를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그의 말 속에는 실패를 죄악으로 간주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완벽을 고집하면 성공에 거의 다다랐음에도 그 근처에서 스스로를 좌절케 만들 뿐이라는 숨겨진 의미가 담겨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면서 성공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 실패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보다 건설적인 사고 방식이다. 이탈리아의 리빙 용품 제조사인 알레시(ALESSI)의 CEO 알베르토 알레시(Alberto Alessi)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매년 출시하는 제품 중에 실패한 것이 1건도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그는 모든 성공은 실패한 경험과 환경에서 나옴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실패는 초라하고 성공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패는 성공은 얼굴과 행동이 똑같은 쌍둥이다.

작가 매들린 랭글은 실패에 대해 말할 때 성공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간의 주름'이라는 대표작을 출판하기까지 2년 반 동안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에서 얻은 실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실패가 허락된 유일한 창조물이다. 만일 개미가 그랬다면 죽음 뿐이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도록 허락됐다. 만일 마음 놓고 실패할 수 없다면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배우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힘이지, 성공하기 위해 쓰고 버리는 1회용 젓가락이 아니다.

당신이 만일 실패를 했다면 그것 때문에 낙담하고 괴로울지 모르겠다. '잘 할 수 있었는데 난 왜 이리 못낳을까?'라며 자신을 꾸짖는다. 이런 자책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자신에게서 끝나면 좋으련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더 바보인 것처럼 느껴지고 패배감에 젖고 만다. 이 또한 실패와 성공을 한묶음으로 연상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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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매닐로


하지만 당신은 타인의 눈을 의식할 이유가 전혀 없다. 토머스 길로비치를 포함한 3명의 심리학자들은 코넬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진행했다. 어떤 학생에게 배리 매닐로가 그려져 있어 보기에 민망한 티셔츠를 입게 한 후에 다른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에 들어가도록 했다. 길로비치 등은 적어도 50%의 학생들이 그 학생이 입은 티셔츠를 알아볼 거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겨우 23%의 학생들만이 그 티셔츠에 주목한 것이다. 여러 종류의 티셔츠(남루한 것, 촌스러운 것 등)를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비슷했다.
 
짐작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실패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있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금방 잊어 버린다는 점을 실험 결과가 말해 준다. 실수로부터 뭔가를 배우기보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자기혐오의 철창 안에 갇히는 것은 매우 슬픈 비극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초연해진다면, 실패로 인한 고통과 패배감은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의 시선에 뻔뻔해지고, 실패를 과거의 일로 정리해야 한다. 그냥 잊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10년 전 일기를 들여다 보듯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라는 의미다. 그러면 실패란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만드는 지표가 되고 자신이 좀더 세련되도록 일러주는 지침이 된다.

당신에게는 부실한 계획, 모자란 능력, 게으름과 낮은 집중력 등과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한계라고 인식하고 분석하는 순간 오히려 실패의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으며 힘을 축적할 수 있다. 그냥 주저앉아 실패의 고통에 매몰된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공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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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뮤지컬 영화에서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냈던 전설적인 영화배우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가 신인 시절 1928년에 한 영화사가 실시한 카메라 테스트에서 이런 평가를 받았다. "연기도 꽝, 노래도 꽝! 살짝 대머리!" 우리에게 마릴린 먼로로 알려져 있는 노르마 진 베이커는 1944년에 모델이 되기 위해 블루 북 모델 에이전시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비서 일을 찾아 보든지,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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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아스테어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이 멋진 아이디어를 보고서로 꾸며서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데, 그가 보고서 앞부분에 있는 개요만 읽어보거나, 설명을 하는데 잘 듣지 않고 엉뚱한 페이지만 넘겨 보면서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진 적은 없었는가? 그가 "집어 쳐"라며 아이디어의 우수함을 칭찬하기보다는 그것이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며 문제점만 잔뜩 늘어 놓은 적은 없었는가?

만일 상사가 당신을 그렇게 대했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절망하여 몇날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면서 참담한 기분일 것이다. '진짜 내가 능력이 없는 걸까? 내가 이 회사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라며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과 절망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면접관의 환상'을 모욕의 그 순간에 기억해 낸다면 말이다. 상사나 면접관의 위치에 서면 지원자(혹은 부하직원)들이 앞으로 일을 잘 할지 못 할지를 평가하는 능력에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다. 여러 차례 실시된 심리 실험에 의하면, 면접관(혹은 상사)들은 '사람 보는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지원자가 면접하는 동안에 보인 행동과 말을 마치 그 사람이 나중에 보일 능력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의 자신감을 보인다. 면접관 자신의 편견이나 컨디션에 따라 상대방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 내리기도 하고, 지원자의 말 실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들은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편견에 따라 사람을 뽑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사람 보는 눈'을 자신하는 경영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이 진짜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위치한 '높은 자리와 경력'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게 평가해도, 그들의 '눈'은 다른 사람들의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 잘 본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충분히 실수를 저지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실패자야' 혹은 '실패하고 말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 그사람의 지위나 전문성이 높을수록 그런 평가를 더 잘 받아들이는 실수를 또한 저지른다.

자신감이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낸 실패 메시지(진심 어린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규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감 = 실패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

나에게 '실패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실패 메시지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의견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내가 꿈을 위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노력한 과정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단편만을 보고 나의 전부를 판단한다. 불완전한 '사람 보는 능력'에 인생을 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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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프레드나 마릴린이 면접관들에게 들은 것은 "당신들은 실패자들이니, 여기 얼씬도 하지 마시요"라고 말하는 실패의 메세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꿈을 성취하여 영화사(史)의 아이콘으로 당당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작건 크건, 모든 실패 메시지는 수신해서는 안 된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다른 사람이 규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결코 실패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실패는 오직 나만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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