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나 동료들과 함께 업무에 관련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 서로 약간의 갈등이나 오해가 발생하여 이를 대화로써 해소하려 할 때,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진행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대화가 마무리되길 원할 때, 여러분은 아래의 두 회의실 중에 어떤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보다시피 위 회의실은 둥글게 마감된 가구들로 채워져 있고 아래의 회의실은 모서리와 꼭지점이 명확하게 살아난 직선형의 가구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출처 : 아래의 논문)



시벨 다즈키르(Sibel S. Dazkir)는 인터넷을 통해 이렇게 곡선형과 직선형의 가구가 각각 배치되어 있는 사진을 100명의 참가자들에게 보여주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각각의 방에서 얼마나 행복함을 느끼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지, 각 방의 분위기가 얼마나 사교적으로 느껴지는지 등에 대해 답했습니다. 다른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서 가구의 색깔을 모두 회색으로 통일시켰고 일체의 다른 장식품은 배제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참가자들은 두 개의 방이 모두 따분하게 느껴진다고 답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을 위해 의도적으로 흑백사진을 보여줬고 다른 장식품을 배제하느라 가구 배치가 단조로웠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참가자들은 곡선형의 가구가 배치된 방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보다 느낄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평가가 끝난 후 이루어진 주관식 설문에서 참가자들은 곡선형의 방이 자신을 환대하는 듯하고 조용한 느낌을 준다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물론 다즈키르의 실험은 참가자들의 설문에만 의존한 것이라 '곡선형의 가구가 편안함과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가설을 완벽히 증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곡선형 가구와 직선형 가구들이 각각 놓인 장소에서 참가자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어떤 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지를 살펴봐야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최후통첩 게임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죠.


그래도 이 연구는 회사 내에서 겪곤 하는 껄끄러운 일을 대화로 해결하고자 할 때 직선형의 가구들이 놓인 회의실보다는 가능하면 둥글게 마감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회의실을 이용하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시사점을 줍니다. 인간의 심리가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네모난 탁자보다는 둥근 원탁에서, 딱딱한 의자보다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야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사무실이나 회의실의 가구는 어떤 모양입니까? 가구 모양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랍니다. '가구는 과학'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참고논문)

Sibel S. Dazkir, Marilyn A. Read(2011). Furniture Forms and Their Influence on Our Emotional Responses Toward Interior Environments. Environment and Behavior, Vol.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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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집에서 애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남성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직업 세계에 여성들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지요? 여성들에게 가장 적당한 직업은 요리사, 간호사, 교사일까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정말로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겁니다. 이 블로그의 방문자분들은 훌륭한 양성평등주의자(혹은 페미니스트)일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방금 함정에 걸려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한 후에 누군가가 성(gender)과 관련된 판단 과제를 제시하면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적인 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죠?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할수록 나중에 편견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그럴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이는 베누이 모닌(Benoît Monin)의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모닌은 20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질문 5개를 제시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멘트 회사에서 사업 확장을 위해 신규직원을 뽑는다는 가상의 사례를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례는 지원자가 고객과의 협상력, 공사 감독과 건설회사와의 친화력, 전문 기술 등이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 직원이 적합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죠. 모닌은 참가자들에 남성과 여성 중 누가 이 포지션에 적합할 것 같은지 물었습니다.


5개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임을 강하게 유도 받은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은 참가자(사전에 질문를 제시 받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멘트 회사에 근무할 사람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대답을 더 많이 내놓았습니다. 분명히 여성 차별적이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남성성이 강한 직업에서 여성을 더 많이 배제하려 했던 겁니다.


후속실험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닌은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원하는 지원자 5명의 이력서를 보여주고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는 과제를 참가자들에게 던졌습니다. 지원자들 중에는 유일하게 백인 여성 1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나머지는 모두 백인 남성), 명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누가 봐도 다른 지원자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죠. 이런 조건 하에서 참가자들은 '나는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신호를 받았거나 '나는 여성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닌이 첫 번째 실험에서 제시했던 시멘트 회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참가자들은 이런 조건에 노출되지 않은 참가자들(지원자 5명 모두가 백인 남성이라는 조건을 접한 참가자들)에 비해 여성보다 남성을 더 많이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모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에 대한 편견 상황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을 수행했는데,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음을 사전에 자극 받은 참가자들이 신임 경찰관으로 흑인보다는 백인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렇듯 성, 인종, 정치적 성향 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자극 받고 나면 그 다음에 보이는 판단과 행동이 편견에 빠지고 마는 현상, 간단히 말해 편견이 없다는 자신감이 오히려 편견에 의한 행동을 강화시키는 현상, 이를 심리학에서는 '크레덴셜 효과(Credentials Effect)'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직전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자신하거나 느낄수록 그 다음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적이어도 된다는, 일종의 자격(credentials)을 부여 받는다는 뜻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일을 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도덕적 허용(Moral licensing)'이란 개념과 크레덴셜 효과를 연결하면 평소에 양성평등을 외치던 사람이 엉뚱하게도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하거나 성희롱를 저지르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편견이 없다고 자신하면 오히려 편향된 행동이 강화되는 현상. 인간의 심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합니다. 여성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일수록 알게 모르게 차차 여성 인재(혹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드러날지 모릅니다. 또한 기업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필수로 진행하곤 하는데 크레덴셜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라지 않는 상황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고논문)

Benoît Monin, Dale T. Miller(2001), Moral Credentials and the Expression of Prejudi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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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평소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지식과 반대되는 결과를 접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 반하는 결과가 그냥 제시된 것이 아니라 엄정한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나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거나 의심하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믿음을 고수할까요? 우리는 보통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철저한 조건과 방법을 통해 산출된 객관적인 결과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마이클 마호니(Michael J. Mahoney)라는 학자는 교묘한 실험을 실시함으로써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야'라고 자평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는 신념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마호니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75명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어떤 외부 자극(보상과 처벌 등)을 지속적으로 가하면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고 원하는 행동 패턴을 강화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심리학의 분파입니다. 쥐로 하여금 지렛대를 눌러 먹이를 먹도록 훈련시킨 B. F. 스키너가 행동주의 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였죠.

마호니는 75명의 행동주의 심리학자에게 학술지에 게재될 예정인 논문 하나를 읽고 그 논문의 질과 학술잡지 게재 여부를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논문에는 아이들에게 나무 퍼즐 놀이와 책 읽기를 할 때 보상을 하느냐에 따라 그 두 가지 활동에 아이들이 계속 흥미를 느끼는지의 여부를 실험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그 논문이 보상을 통해 두 가지 활동에 대한 흥미가 계속 유지됐다는 결과를 담고 있다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에게는 '마음에 쏙 드는' 논문일 겁니다. 반대로 보상이 오히려 놀이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를 떨어뜨린다는 논문이라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심기는 꽤 불편하겠죠? 허나 그 논문은 엄밀한 데이터를 담고 있기에 실험 대상자인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더라도 그 논문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과학자로서 지성과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마호니는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실험 방법을 담았지만 실험 결과가 다르게 조작된 5가지 버전의 논문을 만들었고, 심리학자들을 5개의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각 그룹에게 5가지 버전 중 하나를 읽고 논문의 질과 잡지 게재 여부를 평가하여 45일 안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를 들어, 1그룹에게는 행동주의 심리학을 뒷받침하는 논문을 보냈고, 2그룹에게는 데이터만 살짝 바꿔 상반되는 내용의 논문을 보냈던 것이죠(나머지 3개 그룹은 비교 목적으로 설정. 자세한 사항은 이 글 맨 아래의 참고논문 참조). 

수거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평가 결과는 전문가들도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보통 사람들의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뚜렷하게 나타냈습니다. 동일한 실험 방법론을 적용한 논문이기에 객관적인 눈을 가진 학자라면 편견 없이 두 가지 논문을 거의 비슷한 점수로 평가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논문은 높게 평가하고 학술지에 게재해도 무난한 수준이라 평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믿음과 상반되는 논문은 질이 낮고 실험 방법에도 문제가 있으며 학술지에 게재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마호니의 실험으로부터 우리는 전문가들이 무언가를 평가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편향이 강하게 개입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믿는 것만 보이고 믿는 것만 믿는다는 '확증 편향'은 보통 사람들보다 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의 수준이 높은 전문가들에게도 만연된 현상이라는 점을 느끼게 합니다.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달성 불가능한 목표인지 실감케 합니다.

알게 모르게 확증편향에 좌우된다면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나 평가가 얼마나 취약한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내려진 평가를 고수할 것이 아니라 '내 판단에 무슨 문제는 없는가? 나의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통해 수정해 가야 합니다. 또한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의 말을 한번 정도는 걸러서 들어야겠죠. 오히려 '나는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주관적 편향에서 벗어나 객관적 판단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죠.

상사가 부하직원의 성과와 역량을 평가할 때, 신사업의 타당성을 평가할 때,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할 때, 확증편향은 도처에서 우리의 객관적 판단에 검은 안대를 씌웁니다. 그 검은 안대는 벗기려 해도 절대 벗겨지지 않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이쪽으로 가는 게 맞으니' 한 방향을 정해서 뚜벅뚜벅 걸어 가야할까요, 아니면 조금씩 앞을 더듬으며 나아가야 할까요? 후자의 행동이 확증 편향이라는 검은 안대의 방해로부터 우리의 판단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겁니다.

(*참고논문 : Publication Prejudices: An Experimental Study of Confirmatory Bias in the Peer Review Syst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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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쥐는 왜 꼼짝하지 않을까?   

2011. 12. 16. 11:40



여기에 쥐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쥐를 길다랗고 좁은 길 위의 한쪽 끝에 놓습니다. 쥐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길은 바닥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길의 반대편 끝에 먹이를 놓아 둡니다(아래의 그림 참조). 

A --------------------------- B
(쥐)                                        (먹이)

그러면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그 쥐는 좁은 길을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길 끝에 있는 먹이를 취하겠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보통의 쥐는 특이한 조건(배가 엄청나게 부르거나 아프거나)이 아니라면 대개 그렇게 행동합니다. 

헌데, 실험조건을 아래와 같이 조금 바꿔 보면 쥐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A --------------------------- B
(쥐)                                     (전기충격)

먹이가 위치했던 곳에 전기충격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쥐는 멋도 모르고 좁은 길을 달려가다가 B 위치에서 강한 전기충격을 느끼겠죠.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불쾌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겁니다. 그래서 B는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점을 학습하겠죠. 그래서 A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을 보일 겁니다.



이제 위의 두 실험조건을 하나로 합쳐보겠습니다. 아래와 같이 먹이와 전기충격 장치를 B 위치에 같이 놓으면, 이 불쌍한 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A --------------------------- B
(쥐)                                     (먹이 & 전기충격)

이 쥐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픈 상태입니다. 그래서 B에서 솔솔 풍겨져 나오는 먹이 냄새로 인해 배고픔이 더욱 가중되겠죠. 하지만 이미 B에 가면 상당히 기분 나쁜 전기충격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쥐는 먹이를 향해 조금 다가가다가 좁은 길 위의 어느 지점에 머물며 먹이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상황을 연출하겠죠.

B쪽으로 갈수록 먹이의 유혹이 커져서 B쪽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B쪽으로 갈수록 전기충격의 '악몽'이 더욱 생생해져서 B로부터 멀리하려는 욕망이 균형을 이루는 위치에서 쥐는 걸음을 멈출 겁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쥐는 그 위치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쥐의 욕망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전기충격을 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가 '먹이에 접근하고 싶은 욕망의 기울기'보다 더 큽니다. 그 이유는 대개의 동물이 생존을 위해 일단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생명에 지장을 줄 거라 여기는 것)에 더 큰 가중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닐 밀러(Neal Miller)라는 심리학자가 1944년에 수행한 고전적인 실험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두 개의 동기가 충돌하는 갈등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었죠. 닐 밀러는 음식에 접근하고자는 동기와 전기충격을 회피하고 싶은 동기 사이의 갈등을 '접근-회피 갈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어떤 대상에게로 다가가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때 겪는 갈등을 말합니다. 

인간도 수없이 다양한 '접근-회피 갈등' 상황에 놓입니다. 이 '접근-회피 갈등'이 조직 운영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조직의 리더들은 구성원들이 뭔가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하기를 기대합니다. 좀더 획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도하기를 원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독려합니다.

하지만 많은 도전들은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지만 그 성공확률은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 얻게 되는 손실과 도전 과정에서 소요된 돈, 시간, 인력 등이 시도하지 않았으면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으로 인식됩니다. 그 바람에 도전에 실패하면 도전을 독려할 때와는 판이하게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집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자를 찾고 그 사람을 희생양 삼으려는 사태까지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나중에 생길 또다른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의 불쌍한 쥐가 겪었던 '접근-회피 갈등'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뭔가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비난과 벌을 받았던 경험이 있을때, 실패한 다른 도전자의 말로를 직접 보고 들을 때, 조직이 실패에 '필벌'하는 문화가 강할 때, 어느 누구도 선뜻 도전의 열매를 취하려 발벗고 나서기가 힘들 겁니다. 비록 그 도전을 성공리에 마쳤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회사는 실패를 너그러이 용인한다' 혹은 '실패를 장려한다'라며 외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질 않는다', '직원들은 도전정신이 없다'며 한탄하는 '입'들을 자주 만납니다. 도전에 성공하면 나름 괜찮은 금전적, 비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도 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알아서 착착 하지 않는지 답답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업들은 진짜로 실패를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먹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더 큰 '전기충격' 장치를 함께 가져다 놓고서 직원들에게 그곳으로 달려가라 명하는 것이 과연 먹힐지, 그렇게 명하는 자기 자신은 그곳으로 달려갈 용기가 진짜로 있는지 자문하고 자답해야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업무 수행을 잘 하려다가 몇 천만 원 가량의 손실을 회사에 끼쳤다고 합니다. 그 분의 상사가 괜찮다면서 자신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노라고 다독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어떻습니까? 진짜로 실패를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척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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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이 두려우세요?   

2011. 4. 6. 09:00



이라크 아부 그레이브 감옥에서 간수 역할을 담당한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포로들을 상대로 저지른 가혹행위는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알다시피 이반 프레드릭 상사를 비롯한 여러 병사들은 그 때문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불명예스럽게 군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왜 나약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그렇게 잔인한 행위를 저질렀던 걸까요? 무엇이 그들을 '악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나약함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이라는 유명한 연구를 수행한 학자입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평범한 인간들이 악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사람이 원래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상황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죠. 그는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통해 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짐바르도는  미국 병사들이 극도로 열악하고 초조한 상황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에서 병사들은 쥐들이 들끓고 변기가 흘러넘치는 더러운 환경에서 근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교도소 바깥에는 적대적인 이라크인들이 호시탐탐 자기들을 노리고 있었고 폭탄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죠.

여러분이 미국 병사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포로(혹은 죄수)들에게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우리는 포로들을 발가벗기고 맹견으로 위협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간수들의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경악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거야'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정당하지 않을뿐더러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인간의 심리에 내재된 '노출 불안'을 떠올린다면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노출 불안'이란 자신의 나약함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날까 염려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자신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때 지배를 받거나 통솔을 받는 사람들로부터 약한 사람이라고 인식될까 두려운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나약함을 드러내면 그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나아가 공격까지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약하게 보이면 저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폭동을 일으킬거야' 라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죠. 특히 돌아가는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을 때 노출 불안은 극에 달합니다.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에서 간수들이 처한 상황처럼 말입니다.

기업에서도 노출 불안의 현상이 가끔씩 나타납니다. 내외부 환경이 회사의 성과에 악영향을 미칠 때, 직원들이 경영자들을 상대로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거나 회사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할 때 노출 불안을 보이는 리더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은 '직원들에게 현 상황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서는 안돼. 그렇게 하면 분명히 나를 우습게 볼거야. 강하게 나가야만 해' 라고 결심하고 소위 '강경책'이라는 카드를 직원들에게 내보입니다.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을 때 유화책보다는 강경책이 더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겉으로는 리더들의 주장대로 문제해결의 신속함과 효과인 듯하지만 속을 파고 들어가면 리더 자신의 위신과 신뢰감을 보호하려는 심리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신과 신뢰감이 한번 무너지면 권위가 무너지고 회사 성과가 파탄에 이른다는 사고의 악순환이 머리 속에서 끝없이 순환하면서 커뮤니케이션 단절, 협상 불가, 무리한 억제 등 강경 일변도의 정책에 매달리게 되죠.

노출 불안은 비단 리더나 경영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 협상이 난항을 겪고 종종 물리적인 충돌로 악화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사측과 노측 모두 노출 불안에 휩싸여 협상의 여지를 스스로 제거해 버리기 때문은 아닐까요? 차갑고 강인하게 보여야만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교착상태에 이르게 만듭니다.

피지배적인 계층을 강경하게 억압하거나 협상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 말고 노출 불안의 심리가 일으키는 악효과는 한번 결정한 사항은 절대로 수정하지 않고 밀고 가는 독단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의사결정이 잘못됐다라는 신호가 곳곳에서 들어와도 이미 실행 중인 계획을 수정하거나 중단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조직 성과에 반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짓기도 합니다.

노출 불안으로 인한 과잉 대응, 강압적인 조치, 의사결정의 독단은 상대방의 '과잉 보복'을 야기하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이죠. 노출 불안은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회사측의 배려 없는 조치에 직원들의 물품 절도율이 크게 느는 현상과 같은 '작은 복수'부터 시작해서 총파업에 이르는 과잉 반응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노출이 두려운가요? 노출 불안이 이러한 잘못된 행동과 의사결정을 야기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할 수만 있다면 어려운 상황이나 난국에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노출 불안 심리를 걷어낸다면 강경책이 아니라 유화책이, 억압보다는 화합이, 일방통보보다는 협상과 설명이 조직의 안정과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할테니까요.

존 F. 케네디는 "정중함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인정 받고자 나약함을 감추지는 않는지, 그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지 매순간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 이것도 중용의 마인드일 겁니다.

(*참고도서 : '루시퍼 이펙트', '생각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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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집중력은 안녕하십니까?   

2010. 9. 28. 09:00


1995년 어느 날, 길을 건너던 열일곱 살의 티모시 마이어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운전자가 빨간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운전자가 똑바로 전방을 주시만 했더라도 티모시는 죽지 않았을 터였습니다. 사실을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지도를 펼쳐놓고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시에 휴대폰 통화를 하거나 했던 모양입니다.

티모시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마이어는 심리학자였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 멀티태스킹의 위험함을 증명하기 위한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운전자가 운전 이외의 일에 '멀티태스킹한' 나머지 자신의 소중한 아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죠. 


어쩌다가 우리들은 멀티태스킹의 귀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PC화면에 뜬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살펴보다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 오는 친구와 수다를 떨고 그 친구가 일러준 연예인의 스캔들 이야기를 보기 위해 대화를 하면서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검색합니다. 그러다가 옆의 동료가 물어보는 질문에도 대답을 하죠.

PC, 휴대폰, 다양한 소프트웨어 등의 등장과 범용화로 인해 사람들은 한꺼번에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멀티태스킹을 부추기죠. 우리는 진짜 멀티태스킹의 귀재가 된 걸까요? 하지만 에드워드 마이어는 "멀티태스킹은 허구"라고 단언하면서 정확히 동시에 두 가지의 일을 처리하는 일은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실제로 뇌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없습니다. 동시에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뉴스를 검색한 이후에 옆의 사람과 대화를 하고, 대화를 한 이후에 뉴스를 검색하는 식으로 뇌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나 멀티로 여러 일을 수행할 수 있는데, 인간이 컴퓨터를 거의 끼고 살다시피 하니까 컴퓨터처럼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모양입니다.

멀티태스킹(엄밀히 멀티태스킹은 아니지만)은 티모시의 죽음처럼 극단적인 위험만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멀티태스킹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발생하는 비용은 꽤 크죠. 그 비용이 바로 '전환 시간'입니다. 하나의 일을 마치고 다른 일을 수행할 때 즉각적으로 뇌의 프로세스가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일로 전환할 때 생각의 끈을 복원하려면 시간이 들기 마련입니다. 글로리아 마크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일을 하다가 예전 작업으로 돌아오는 데에 약 25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친구와 메신저로 열심히 수다를 떨다가 모니터에 뜬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작성하려면 "내가 지금까지 뭘 했더라"하면서 작업의 흐름을 다시 훑어야 합니다. 머리 속에서 다른 일들이 일으킨 잡음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완벽하게 하나의 일로 복귀하는 데에 25분이나 걸린다는 것이죠.

이 시간이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메신저, 휴대폰 문자 메시지, 전화 벨 소리, 동료의 부탁 등의 '방해'로 인해 하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에 이름을 알면 심각한 수준이 됩니다. 글로리아 마크가 1,000명의 직원들을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인터럽션'을 거는 경우가 45퍼센트에 이르고, 이 때는 전환 시간이 28분이 걸린다고도합니다.

이렇게 방해가 일어나는 시간을 모두 합산하면 하루에 2.1시간이나 된다고 하니, 이 시간을 급여로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비용임을 알 수 있죠. 바로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것이죠.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우고 성취하려면 한곳에 자신의 집중력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타인으로부터의 방해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오는 방해를 차단해야 합니다. 하나를 완전히 완료하고 나서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여러분의 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여러 일을 이것저것 왔다갔다 하면 많은 일을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멀티태스킹은 하나의 일을 더 오래 끌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일의 품질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신화(myth)입니다.

여러분이 이 짧은 포스팅을 읽는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인터럽션(남으로부터나 자신으로부터나)이 발생했나요? 저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들을 등교시키느라 열 번 넘게 방해를 받았답니다. 방금은 디지털 시계를 보면서도 "몇 시야?"란 아들의 뻔한 질문에 신경이 곤두섰지요. 여러분의 집중력은 안녕하십니까?


(*사례 출처 : '집중력의 탄생', 다산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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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로트터스란 심리학자는 피실험자들에게 자동차 사고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준 후에 한 집단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동차가 충돌하기 전의 속도가 얼마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집단의 피실험자들에게는 "자동차가 세게 충돌하기 전의 속도는 얼마 정도입니까?"라고 물었죠. 

첫번째 집단에게는 충돌하다란 의미로 hit를, 두번째 집단에게는 세게 충돌하다란 의미로 smash를 사용했지요. 세번째 집단에게는 접촉하다란 뜻의 contact를 대신 사용해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각 집단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차이가 났습니다. smash(세게 충돌하다)를 들은 집단은 평균 40.8 마일, hit(충돌하다)를 들은 집단은 평균 34.0 마일, contact(접촉하다)을 들은 세번째 집단은 평균 31.8 마일이라고 각각 답했습니다. 동일한 동영상을 봤는데도 질문자가 던진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답변의 유의미한 차이를 야기한 것입니다.

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손(오른손잡이라면 왼손)으로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종이에 쓰라고 피실험자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한 집단에게는 이름을 쓰는 동안 잘 쓰는 손(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을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책상에 올려 놓으라고 했고, 다른 집단에게는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책상에 올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글씨를 다 쓰고나서 심리학자는 유명인사들에게 대한 호감 여부를 피실험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던 집단이 손바닥을 아래로 향했던 집단보다 유명인사들을 더 긍정적으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행동은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행동은 무의식으로 상대방을 거부하는 마음을 일으켰던 겁니다.

위의 두 가지 실험은 사소한 차이가 우리의 판단이나 믿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철썩 같이 믿는 근거가 겨우 단어의 뉘앙스 차이와 무의식적인 행동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블링크(Blink, '척 보면 안다')를 전적으로 신뢰했다가는 나쁜 의사결정을 내릴지도 모름을 시사합니다.

인간의 지능은 놀라운 문명을 이룩할 만큼 위대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가 잘 설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존의 필요에 따라 이것저것이 덧대어진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버그를 수정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이 '패치'가 가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에 엉성했던 시절에 했던 불완전한 판단을 꽤 많이 저지르고 말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사결정과 판단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우리의 두뇌가 우리의 판단과 기억을 왜곡시키고 기만한다는 점을 안다면 머리에 바로 꽂히는 블링크를 경계해야겠죠. 사소한 차이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남들보다 옳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편안한 금요일 되세요.

(*사례 출처 : '클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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