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에 관한 철학적 단상   

2011. 11. 1. 09:20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무언가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은 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짚어보겠습니다.

플라톤 시절부터 철학자들은 '세 갈래 이론'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기준을 통해 '안다는 것', 즉 지식을 정의해 왔습니다.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하면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안다'면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한다는 뜻이죠. 그 세 가지 기준은 바로 '믿음', '정당화', '진리'입니다.



첫 번째 기준인 '믿음'에 의하면, 우리가 1+1=2를 안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믿음'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면 절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해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지식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지식도 상대성 원리를 갖는 걸까요?

믿음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여러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걸 믿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위대한 과학자가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안다' 말은 정당화의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죠. 1 + 1 = 2임을 안다면, 믿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있어 그의 '' 수준은 양자역학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철학적 기준으로 본다면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기준인 '정당화'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믿음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학적 증명이든, 과학적 실험이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동시에 닿는다'라는 갈릴레이의 믿음도 피사의 사탑(여기서 실험했다는 것이 허구라는 지적도 있지만)에서 사람들에게 시현하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제안, 진술, 사실을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증거가 얼마나 타당하냐는 것이죠.
 

세 번째 기준인 '진리'는 결과론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지식이 되려면 진짜로 옳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믿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지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충분히 믿고 충분히 정당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니었던 사례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을 믿고 천문학자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동설을 정당화했지만 결국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떤 지식이 진리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파악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것을 믿고 정당화하여 진리로 인식한다 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지 새의 이름만 뿐인데도 모든 안다고 자부하곤 합니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중요하죠.

안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있어야 여러분은 비로소 '아는 '입니다. 안다는 것의 세 가지 기준을 들여다 보면서 주위를 둘러싼 지식을 고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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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과 친구가 되자   

2010. 2. 19. 11:39

양자역학의 거두, 하이젠베르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양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순간 운동량을 측정할 수가 없고, 반대로 운동량을 측정하는 순간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으로서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원리입니다.

경영에서도 비슷한 법칙이 존재합니다. 바로 '불확실성의 원리'죠. 기업의 현 상황과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기업이 처해 있는 상황에 적합하도록 전략을 수립했더라도 그것이 한 달 후에 유효할지는 아무도 담보하지 못합니다. 

또한 미래의 환경을 나름대로 감안하여 전략을 세워도 현재의 상황과 역량을 고려치 않는다면, 말 그대로 ‘근사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지요.

(집 모양이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씩 다르네요)



확언컨대, 현재는 과거보다 불확실하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불확실할 겁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반대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말하듯, 우리 주변의 무질서함은 예측 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불확실성을 낳고 불확실성은 기업환경의 무질서 정도를 점점 증가시킵니다.

바퀴 두 개짜리 수레와 비교조차 불가능한 자동차의 복잡한 구조를 떠올려 보면, 복잡함이 불확실성과 무질서함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전자장치 오작동으로 급발진 사고를 일으키는 이유는 첨단 전자장치로 무장한 자동차의 내부구조 때문이죠.

기업환경의  무질서함은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이 많아지고 또 어디로 튈지 모르게 각자간의 상호작용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별 상관 없는 산업영역에 있던 기업이 갑자기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신생기업이 과거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략으로 새롭게 부상하거나 하는 등의 현상이 나날이 발생하기 때문에 환경은 점점 무질서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업체가 제공하는 소액결제방식이 신용카드의 아성을 위협한다든지, 소위 지속가능력(Sustainability)을 내세워 기업의 환경보호와 사회공헌 등에 대해 정부와 일반대중이 압박을 가한다든지, 기업으로선 신경 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무질서해지고 기업은 할 일이 많아집니다.

누구나 불확실성을 싫어합니다. 하다못해 내일 아침에 우산을 가져갈 것이냐 말 것이냐 놓고 고민할 때,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TV를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지요. 기업도 마찬가집니다. 어쩌면 기업이 매일매일 하는 활동의 많은 부분이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회의를 하거나 보고를 하고 고객을 만나 이야기하고 교육을 받는 등의 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기획부서에서는 앞으로 1주일, 한 달 후, 1년 후 등의 미래에 우리의 실적이 과연 어떻게 될까, 경쟁사들은 어떻게 될까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도 기업이 굳건히 살아남기 위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인사부서에서는 우수인재를 뽑고 육성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아마 미래가 불확실하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는 인력과 각종 인프라의 3분의 2 정도는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없어도 될 인력’을 불확실성 때문에 보유한다는 말입니다. 엔트로피를 줄이려면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어지러워진 방을 청소하려면 손에 청소기를 들고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함이 커진다 해서 ‘무질서를 감소시킬 사람’을 예전보다 많이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성 증가의 압박도 동시에 커지기 때문이죠. 따라서 기업은 인력을 덜 고용하는 대신에 현재 근무하는 인력에게 더욱 많은 일을 시키게 되고 과거보다 양질의 성과를 요구하게 될 겁니다. 

우울하게도 이것이 미래학자들이 내다보는 미래의 모습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무질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많고 더 어려운 일을 시키게 될 겁니다. 또한, 인력의 규모가 노조의 교섭력 강화, 인력관리의 비용 증가 등과 같이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미래에는 전문성을 지닌 ‘프리 에이전트(Free Agent)’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제까지는 예측을 잘 하는 기업이 성공해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측기법에 기반하여 기획부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곧 쓰레기가 될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만들지요. 그러나 미래는 예측 가능하리란 가정과 바람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미래에는 ‘확실히’ 불확실성을 잘 다루는 기업이 산업을 호령하는 시대가 될 겁니다. 미래에 무엇을 할지를 미리 대비하고 ‘실행력’을 구축하십시오. 남이 무엇을 하는지 쳐다보지 말고 무궁무진한 기회의 보고인 미래를 연구하기 바랍니다. 불확실성과 친구가 되십시오. 이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유일한 전략이자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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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2010. 2. 18. 09:00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중입니까? 가르치면서 어려움을 느끼진 않는지요? 가르침을 직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일일지언정 우리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자주 서게 됩니다. 오늘은 남을 잘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 감고서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생(生)초보가 얼마나 한심할까요? '내'가 하면 1시간이면 뚝딱 해치울 일을 1주일 내내 붙잡고 끙끙거리는 부하직원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터질까요? 

가르치는 자 중에서 겸손하지 못한 자는 화가 앞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것도 못하냐며 윽박지르고 상대방을 비하합니다. 혹은, '네가 나의 깊은 뜻을 알기나 하겠어' 라며 업신여기거나 무시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자의 이런 태도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지 못합니다. 반발하고 저항할 뿐입니다. 인간은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부모가 아이를 가르칠 때 ‘이것도 모르냐’며 불같이 화를 내며 답답해 하거나 급기야 매까지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하나의 개념을 받아 들이려면 수백 번의 반복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가르치려는 태도는 자녀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심하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육자인 로린 홀랜더(Lorin Hollander)는 어렸을 적에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 세우는 선생님들 앞에 설 때마다 너무나 공포에 떤 나머지 몇 년 동안 손가락이 마비되어 펴지지 않는 증상을 앓기도 했습니다.

난방장치의 온도조절장치를 20도에서 25도로 높인다 해도 25도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소요됨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추운 날 차를 출발하기 전에 워밍업을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지도할 때는 참을성을 종종 상실하죠. “왜 내가 말한 대로 안 해?”라며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상대방의 미숙함을 자신의 지시에 대한 반항으로 오해하고 못살게 굽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배우는 자가 습득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배운 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1차적으로 가르친 사람이 져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나 지식도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이론에 불과합니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도취되어 일반인들의 낮은 이해력을 비웃으며 더욱 난해한 이론의 벽을 쌓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은 그의 가르치는 자세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는 직관과 배치됩니다.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측정 결과가 달라지고 중력에 의해서 시공간(時空間)이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죠. 

그래서 그는 일반인들이 상대성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책을 썼습니다. ‘상대성 : 특수이론과 일반이론’이란 책인데,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상대성 원리의 입문서로 많이 읽힙니다. 그는 자신의 의붓딸인 마르코트에게 상대성 원리를 가르쳐주면서 그녀가 정말 이해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는 ‘파인만 도형’이라고 불리는 그림 여러 개가 그려진 자동차가 전시돼 있습니다. 그 자동차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생전에 가족들과 여행을 다닐 목적으로 사용했던 누런 색 밴입니다. 

이 파인만 도형(전자와 같은 입자가 서로 접근하다가 광자를 교환하면서 상호작용한 후에 서로 멀어져 감을 나타내는 그림)은 복잡한 수학 계산 없이도 원자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쉽게 통찰하도록 해 주는 파인만의 발명품입니다.

동료 교수이자 경쟁 상대이기도 했던 줄리언 슈윙거 (Julian S. Schwinger)가 수백 개의 난해한 수학식을 써서 유도해 낸 물리학적 의미를 파인만 도형은 간단하게 전달합니다. 이 도형은 오늘날에도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데 큰 가르침을 줍니다. 파인만 도형이 없었더라면 많은 물리학도들이 골머리를 무지 썩었을 겁니다. 파인만 도형은 위대한 학자일수록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입니다.

허나, 슈윙거는 “파인만 도형이 계산을 대중에게 주었다”라고 말하며 이 도형의 가치를 폄하하곤 했습니다. 파인만이 과학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을 깎아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학적인 글을 보면서 얼마나 절망합니까?

‘버스 정류장의 전형적인 월요일’ 같은 정신적 지도는 물리적 사물로 표상될 수 없다. 이러한 표상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시간, 관계, 행동들까지 포함한 표상이다. 그러한 고등한 코드는 또 다른 면에서 인체 지도와 같다 (데이비드 베레비著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도무지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정확히 읽혀도 뜻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력은 전혀 안중에 없는 오만한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지적 폭력'은 아닐까, 란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쉽게 가르치는 것이 어렵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인내하며 가르치는 것이 군림하고 몰아 세우며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여러분이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면, 가르침은 곧 겸손이고 인내임을 가르치는 내내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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