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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0은 홀수지. 아빤 그것도 몰라?"

이 논리의 주인공

KTX 안에서 글을 쓰는 필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우리는 과거의 경험, 문헌 자료, 논리적 근거, 다른 사람의 충고 등 여러 가지 정보와 요소를 바탕으로 해답에 접근해 갑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직관'입니다. 직관이 없다면 문제 해결 과정은 꽤 지난하게 진행되다가 끝내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직관이란 말을 풀어 쓰면 '곧바로 꿰뚫어 본다'라는 뜻입니다. A가 문제이고 B가 해답이라면, A의 위치에서 B에 이르는 지름길을 대번에 알아차리고 딱히 논리적이지 않지만 나름의 근거를 통해 B를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직관입니다.
화재나 테러와 같이 긴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동적으로 아는 능력, 진맥만 해도 환자의 질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능력, 무의미하게 보이는 숫자들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등을 우리는 직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직관이란 신비하고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해답은 저 너머에...
지난 글('쉽다고 과정 무시하면 큰 코 다칩니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반드시 과정을 중시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곧바로 결론을 내지 말고 찬찬히 과정을 밟아가야 옳은 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 글에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더니, 이제 직관도 중요하다고? 서로 모순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A의 답은 B가 맞다'고 말하듯이 금방 결론을 내는 능력으로 직관의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직관은 답에 이르는 '과정'을 대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답(결론)을 곧바로 제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물론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곧잘 답을 말하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어떤 과정과 경로를 거쳐 답에 이르러야 하는지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답을 빠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답이 머리 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문제 풀이 과정의 지름길을 찾아냈기 때문이지, 그냥 답이 뿅하고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직관은 '이 길로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일러주는 능력입니다. 이를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길고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지름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지름길의 데이터베이스는 부단한 연습과 습관으로 쌓입니다. 천부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힘은 더더욱 아닙니다. 충분히 연습하고 경험하면 얻어지는 후천적인 능력입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몸의 일부처럼 체득되면 맡은 영역에서 뛰어난 직관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기록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꺼내 쓰는 능력이죠.
지능이 좋은데도 문제 해결에 쩔쩔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지능은 보통 수준이지만 문제 해결에는 척척박사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경험을 통해 얼마나 직관이라는 능력을 갈고 닦았느냐에 있습니다. 베테랑이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기반으로 직관이 뛰어난 자를 일컫습니다.
물론 직관이 뛰어나다고 해서 항상 올바른 답을 구한다고 보장하지 못합니다. 종종 직관은 잘못된 방향의 지름길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직관 능력에 논리적인 추론 능력을 더할 때 문제 해결에 완벽을 기할 수 있습니다. 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해도 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논리적인 기반을 마련할 때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회의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적인 추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지요.
정리해 봅시다. 문제 해결의 '달인'이 되려면 직관이 필수적입니다. 직관은 문제 풀이의 지름길을 대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매번 옳은 지름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풍부한 경험과 부단한 노력이 밑바탕을 이뤄야 합니다. 경험과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직관이란 그저 '감(感)'에 불과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권력은 때로는 잘못된 권위를 형성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권위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옷이 보인다는 여러 신하들의 말에 속아 나체로 거리행차에 나섰듯이, 권위는 종종 우리를 기만하고 심할 경우 몰락시키기도 한다.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고 굴복 당하거나 순응할 때 우리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1979년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DC-8-61편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추락한 원인은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 나약함에 있었다.
비행기가 포틀랜드 공항에 접근했을 때 랜딩 기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다. 랜딩 기어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기다리면서 공항 근처를 1시간 정도 선회하려고 했는데, 2명의 승무원이 연료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즉각 기장에게 보고해야 할 위급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그들은 기장이 무서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 기장은 평소에 자신에게 질문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는 걸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연료가 다 소진되자 모든 엔진은 꺼지고 비행기는 공항에서 10Km 떨어진 지점에 추락하고 말았다. 기장의 권위와 승무원들의 나약함 때문에 무고한 승객 10명이 죽고 23명이 다치고 말았다.

도전은, 때로는 신념을 옥죄는 권위의식과의 싸움이다. 1854년 8월 영국 런던의 브로드 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불과 열흘 만에 반경 200 미터 이내에 살던 주민 중 5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콜레라는 그 시절에 흔히 있는 전염병으로서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그처럼 국지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경우는 유례 없었다.
사실 콜레라는 공기가 아니라 물에 의해 전염되는 ‘수인성 전염병’이지만, 당시 모든 과학자들은 ‘나쁜 냄새’가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견해(이를 ‘독기론(毒氣論)’이라 한다)를 고집했다. 단 한 사람, 존 스노(John Snow)만은 예외였다.
그는 독기론을 반박하기 위해 나쁜 냄새 때문이 아니라 분뇨로 오염된 물을 먹은 주민들이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모든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어떤 수도 회사(당시 영국의 수도사업은 민영화된 상태였다)로부터 물을 공급받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독기론이 우세하던 시절에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곳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매일 묵묵히 조사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끝내 발병의 진원지가 기저귀를 빤 물이 스며든 마을의 공동우물임을 증명해 냈다.
콜레라 연구에 뛰어 들기 전, 스노는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을 마취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실용화했다. 저널리스트인 볼프 슈나이더(Wolf Schneider)가 “전신 마취술은 전화나 컴퓨터의 발명보다 뛰어난 문화사적 발전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것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수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으로서 스노는 영국 왕족이 인정하는 최고 명의(名醫)로서의 권위를 이미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의 위대성이 빛나는 이유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내가 그런 것까지 해야 돼?’라고 생각할 만한 권위의식을 스스로 깨뜨리고 신발에 직접 흙을 묻히며 전염병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과 타인의 권위를 깨뜨리는 자에 의해 발전한다.
감히 대들 수 없을 것 같은 안온(安溫)한 모든 권위를 차가운 머리로 의심해 보라. 그리고 도전하라. 최고권력자든, 종교든, 신념체계든 대상이 누구라도 덤벼 이겨라. 이것이 이 땅의 젊은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숙명이자 의무다.
어떤 사람은 단호한데 반해,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인데 반해, 어떤 사람은 논리에 의존한다. 각 성격은 모두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간단한 사실을 자주 망각한 채 잘못된 인생 공식과 편견에 지배를 받는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듣기 싫었던, '학교 우등생은 사회 우등생이 못된다'는 말. 이 말을 바꿔 표현하면 '학교 우등생이라고 해서 사회 우등생이 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다. 옳은 말이다. 공부 잘해서 성공한 자가 공부 못해도 성공한 자보다 통계적으로 훨씬 많으니까.
이런 말을 자주 하던 그는 '내성적인 네가 할 줄 아는 건 공부뿐이겠지. 사회 나가면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성공해.'라며 비아냥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무시하고 넘어갈 말인데, 어린 나는 그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지?'
우리는 성공의 조건에 이런 식의 선입견을 보인다. '외향적이고 단호해야 하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며 강조한다. 그러나 성격이 외향적이냐, 내성적이냐가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는 절대 아니다.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연습하면 조금 바뀔지 모르지만 유효기간이 짧다. 성공하려면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 노력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내 스타일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살아갈지 깨달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 절대 우위의 성격이란 없다. 가위가 보를 이기고, 보가 바위를 이기듯 사람들의 성격은 서로 상보적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성격을 내 성격의 잣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고, 위인이나 성공한 자들의 성격과 비교해 위축될 일도 아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 받거나 서로 등을 돌리는 경험을 적어도 한번쯤 한다. 갈등은 많은 고통을 야기하는데, '차이'를 나쁘게만 보려는 습성 때문이다. '네가 나에게 맞춰야 한다'와 '나만이 오로지 옳다'라는 독단으로 상대방의 성격을 재단한다.
사람들 사이의 성격 차이는 당연한 일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물려 받은 쌍둥이도 환경의 영향으로 성격이 다르게 변한다. 그러므로 이혼 사유로 성격차를 들먹이는 부부는 사실 솔직하지 못하다. 다른 사람끼리 만났으면서 다르다고 헤어지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학교나 직장에서 야기되는 대부분의 갈등과 나쁜 인간관계의 주범은 '나와 너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편협한 마음으로 성격의 상(像)을 미리 재단해 놓은 탓이다. '향수'의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처럼 혼자 산골에 박혀 살지 않는 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므로 피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잘 관리해야 할 일이다.
그러려면 사람들 간의 공통점보다 차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가 네 위에 군림한다'는 독선을 버리고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며 상대방의 능력으로 내 능력을 보완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덧붙이는 말)
'학교 우등생은 사회 우등생이 못된다'는 명제, 적어도 나에겐 딱 들어맞은 듯하다. 솔직히 그렇다. 그러나, '참'인 예가 하나 존재한다고 해서 이 명제를 참이라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명제 따위는 잊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