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대의 심리학자인 리차드 펠슨(Richard B. Felson)은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정신병을 앓았던 자, 폭력 전과가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투거나 주먹다짐을 벌였던 경험에 관해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1)  펠슨은 그 상황에서 응답자들이 어떤 조건에 놓였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량적인 분석을 위해 응답자들이 경험한 사건의 상황은 다툼의 심각성 수준에 따라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화가 났지만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때', 둘째 '말싸움을 벌였던 때', 셋째 '주먹이 오고갔지만 무기는 쓰지 않았던 때, 넷째 '무기를 사용했던 때'로 나뉘었죠.


펠슨은 응답자들에게 던진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동성끼리 다툼을 벌일 경우 단 둘이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볼 때 주먹다짐으로 번질 확률이 2배나 높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반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보통 여러 사람들 앞에 있을 때는 다툼이 생기더라도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참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훼손된 자신의 평판이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된다는 위협을 감지하게 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신경 쓰고 염려하는 인간은 평판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불릴 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감행하는 폭력은 상대방으로부터 손상된 평판을 회복시키기 위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똑같이 모욕스러운 말도 단 둘이 있을 때는 말타툼으로 끝나겠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거나 설령 폭력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분노의 강도는 훨씬 높을 수밖에 없죠. 실제로 미국에서는 폭력적 싸움의 3분의 2 가량이 공공장소에서 벌어지고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4분의 3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펠슨의 연구는 부하직원의 잘못을 혼내고자 하는 상사에게 한 가지 귀중한 주의사항을 전해 줍니다. 바로 '절대로 다른 직원들 앞에서 혼내지 마라.'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직원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서 혼내는 상사에게 주먹을 날리는 하극상의 상황을 연출하기는 어렵겠죠. 그렇게 하면 상사로부터 깎인 평판이 '상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놈'이라고 동료직원들에게 각인되어 더 깎일 테니 말입니다. 이보다는, 혼내는 목적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함이든 아니면 욱하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함이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혼내는 행위는 부하직원으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기는커녕 반항심과 분노를 극도로 상승시킨다는 게 문제입니다. 비록 잘못을 인정하고 싶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 때문에 자기합리화와 자기방어의 프로세스가 더욱 강화되어 급기야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거나 부정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으로부터 찾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심리학자 마크 리어리(Mark Leary)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가치, 선행과 악행을 관찰하여 자존감을 형성하고 평판을 높이려고 시도한다고 말합니다.2)  타인이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반대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거부 의견을 밝히면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를 통해 규명한 바 있죠. 여러 사람 앞에서 혼내는 행위는 짧은 시간에 자존감을 한꺼번에 깎아내리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물론 기대하는 행동의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죠.


부하직원을 혼낼 일이 있으면 조용한 장소에서 단 둘이 만나야 합니다(동료 간의 다툼도 마찬가지).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듣는 곳에서 야단을 쳐야 부하직원이 더 분발할 거라고 믿는 자(또 그렇게 행동하는 자)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모르기에 유능한 관리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여러 사람 앞에서 야단을 맞는 부하직원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역지사지하면 바로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혹여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부하직원을 망심 주듯이 혼낸 적이 있다면 그를 조용히 불러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으로 인해 깎여내려간 그의 자존감을 다시 채워주는 일은 관리자의 책무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Richard B. Felson(1982), Impression Management and the Escalation of Aggression and Violence, Social Psychology Quarterly, Vol. 45(4)

2) 존 휘트필드, <무엇이 우리의 관계를 조종하는가>, 김수안 역, 생각연구소, 2012


  
,

뻔뻔하게 삽시다   

2009. 6. 15. 09:06

수첩에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주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곤 합니다. 취미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 그림이지만, 20분 남짓의 시간 동안 그림에 몰입된 스스로를 발견하지요. 그 느낌이 저에겐 아주 좋습니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

꽤 조심스럽게 그린다 해도 어긋나는 선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볼펜으로 그리는 탓에 수정이 어렵죠. 그냥 선 몇 개를 더 그려 넣어서 실수를 대충 무마(?)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엔 아주 젬병입니다. 실제의 얼굴과 그림의 얼굴이 전혀 다르죠.

하지만 인물에 과감히 도전해 봤습니다.


첫번째는 찻집에서 어느 커플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여자가 실수로 컵을 엎지르는 모습이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 엎지르진 않았습니다. 탁자를 균형에 맞지 않게 그린 저의 부주의를 그렇게 그림으로써 덮어버렸죠. 여자의 얼굴은 꽤 예뻤는데 약간 도드라지게 그린 광대뼈와 콧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돼 버렸습니다.


두번째는 제 아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모습인데, 다 그린 걸 보여주니 "내가 왜 이렇게 생겼어?"라며 울상을 짓더군요.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를 늙은 아저씨의 얼굴로 그렸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게다가 허리 아래 부분을 그리기가 어려워서 사진에서 '아웃 오브 포커스'하듯이 선을 어지럽게 휘갈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이불 같다며 아들이 놀립니다.

아들은 자기를 그린 그림이 싫다며 수첩을 찢을 기세로 달려들고 아이의 엄마도 합세하여 면박을 줍니다. 나름 힘들여 그린지라 약간 억울하지만, 맞습니다. 굳이 작품이랄 것도 없는 제 그림 목록 중에서 최악의 실패작으로 분류될 만한 그림들이 틀림없습니다. 고흐, 밀레, 클림프, 루벤스, 르느와르와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보다가 제 그림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지경입니다. 정말 한심하고 쓰레기 같습니다. 그림이라고 불러주는 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자학에 가까운 자평을 하다가도 생각을 고쳐 먹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가 만든 작품를 스스로 평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도저히 못봐주겠습니다",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지"라며 아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평가 내립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능력에 진짜로 실망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먼저 혹평을 내림으로써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어떨까요?

제 아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뭔가를 열심히 그려댑니다. 스케치북으로 모자라서 아예 A4 용지 한다발을 주었습니다. 아들 방은 늘 종이와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어지럽습니다. 아들은 다 그린 그림을 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매번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잘 그렸지요? 예쁘죠?"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렸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도 있지만 솔직히 낙서 같은 그림도 종종 그려옵니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자신의 그림에 무한한 자긍심을 나타냅니다. 어떨 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리지요?"라며 스스로를 극찬하기도 합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은 자학할 줄 모릅니다. 9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한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혹시 어린아이 중에 "내 그림은 정말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이렇게 높은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이 왜 커갈수록 자학을 배워갈까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법을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상대평가법'을 배우는 거죠. 

사회화의 당연한 과정이지만 씁쓸한 면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혹평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무언가를 배우려는 열정이 급격히 식진 않을까, 그리하여 타고난 소질을 잠재된 상태로 영원히 묵혀버리진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도 자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만든 작품을 쓰레기통에 쳐 넣으면서 동시에 실패한 작품을 통해 배우는 기회를 유기하기 때문입니다.작품을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희열의 감정이 자학이라는 싸구려 감정으로 교환되어 마음의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정체( )입니다. 자학은 정체의 늪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림이든, 안무든, 보고서든 자신의 작품을 자학하려는 관성을 버리고 찬찬히 반성하는 태도를 가질 때 개선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감상하듯 즐기고 반성을 통해 배운다면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작품과 만나게 됩니다. 실패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못 그린 제 그림에도 뻔뻔해지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제 그림을 블로그에 공개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제 그림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린 그림입니다"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사랑의 비를 내릴 때 자아가 자랍니다. 자학은 자아를 갉아먹는 해충일 뿐입니다.

【한RSS로 편하게 제 블로그를 구독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