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르네 블롱들로(Rene Blondlot)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빌헬름 뢴트겐이 발견한 X선 연구에 열을 올렸습니다. X선이 입자의 흐름인지, 아니면 파동인지를 밝히려는 것이 그의 연구 주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음극선을 통해서 X선을 석영으로 만든 프리즘으로 쏘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X선이 프리즘이 닿을 때 미세한 빛이 그의 곁눈에 감지됐습니다. 착시인가 싶어 여러 번 실험을 반복했지만 매번 희미한 빛이 느껴졌고 감지기의 스파크도 밝아졌죠.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의해 스스로 놀랍니다.

"이것은 X선이 아닌 새로운 방사선이다!"

(장미에서도 N선이 나온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에 N선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작은 도시인 낭시의 이름을 딴 것이죠. 블롱들로는 N선이 X선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후속 실험을 통해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나 검은 종이처럼 가시광선이 투과하지 못하는 물체는 N선이 쉽게 투과하지만, 가시광선이 통과하는 물이나 암염(돌처럼 변한 소금)은 투과하지 못함을 발견했지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블롱들로의 N선 발견에 열광했습니다. 너도나도 N선을 감지했다는 보고가 잇따랐습니다. 1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N선 연구에 뛰어들어서 겨우 2~3년 사이에 300편 이상의 논문을 쏟아낼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N선을 미간에 쏘면 느끼지 못했던 냄새를 맡게 된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발표됐습니다. 사람들은 블롱들로가 퀴리 부부에 이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거라 의심치 않으며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우드(Robert. W. Wood)라는 미국 과학자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됐습니다. 블롱들로와 함께 실험을 재현해보던 그는 블롱들로가 모르게 석영 프리즘을 제거한 후에 "N선이 감지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블롱들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N선이 감지된다"며 분광기로 수치를 측정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프리즘이 없으면 N선 자체를 볼 수 없는데도 보인다고 말하는 모순을 우드가 포착한 것이죠.

우드가 '네이쳐'지에 이 사실을 공개하자 지금까지 앞다투어 블롱들로를 칭송하던 사람들이 180도 입장을 선회하여 "솔직히 말해 N선을 보지 못했다"면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료 과학자들이 N선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할 때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내기가 두려웠던 탓입니다.

우드의 반증 이후에 N선에 관한 논문은 과학계에서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프랑스 과학 학술원은 여전히 블롱들로를 옹호하면서 그에게 '르콩트 상'을 수여했습니다. 독일에 비해 낙후된 프랑스의 과학을 블롱들로가 위신을 세웠기에 쉽게 그의 오류를 쉽게 인정할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N선 연구가 아니라 '평생 쌓은 업적 전체'에 준다고 상장에 명시했던 것으로 보아 프랑스 과학계도 꽤나 고심했던 모양입니다.

블롱들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내며 "N선"이라는 책까지 출간하여 N선의 존재를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지요. 그는 1909년에 은퇴를 했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다가 1930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납니다. N선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블롱들로가 본 N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실 그는 N선을 '똑바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N선을 발견했던 순간에 '곁눈'으로 그걸 감지했을 뿐입니다. 인간의 눈은 색깔을 감지하는 원추세포와, 명암을 인식하는 간상세포로 이뤄져 있는데, 눈 가장자리에 놓인 간상세포가 감각에 더 예민합니다. 즉 눈동자는 정면을 향해도 옆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감지할 수 있는 이유는 간상세포 덕입니다.

허나 문제는 간상세포가 지나치게 민감해서 똑바로 볼 때보다 곁눈으로 볼 때 원래보다 더 '밝게' 빛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블롱들로가 X선이 프리즘에 닿는 순간 곁눈으로 무언가가 밝아짐을 느낀 이유는 N선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간상세포가 활성화됐기 때문이었습니다. N선은 그의 눈이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의 시사점을 얻습니다. 첫째는 '눈으로' 관찰했다고 해서 항상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기관을 사용한 관찰은 객관적일 것 같지만, 앞에서 봤듯이 인간의 감각기관은 객관적 관찰이란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취약합니다. 감각기관들이 판단을 명철하게 내리는 방향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이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내리는 판단에 스스로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한번 '집단사고'에 매몰되면 그릇된 판단을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사실 블롱들로는 N선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매우 존경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적 업적도 뛰어났죠. N선의 존재를 '발명'한 이후에도 지나치게 확신적이었던 것만 빼고는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비판적 사고가 초점을 맞춰야 할 대상은 블롱들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2~3년 만에 수백 편의 논문을 왜 쏟아냈을까요? 확실하게 감지되지 않는 N선을 가지고 열광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 시절엔 방사선이 첨단 분야여서 N선 연구에 기여함으로써 명성을 얻고자 했던 욕구가 집단사고의 발단이었습니다.

더욱이 다른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분위기는 집단사고를 조장하고 강화시켜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죠. 이와 비슷하게 몇 년 전 우리나라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황우석 사태' 역시 집단사고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무엇인가를 확신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았는데도 판단체계 속에 '하나의 사실'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맙니다. 아직까지 가설에 불과한데도 가설을 계속 접하다 보면 가설과 사랑에 빠져 버리죠. 이것이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확산될 때 집단사고가 자리를 잡고 명철한 판단을 원천적으로 봉쇄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보이는 것이라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해결사'의 냉철한 관점입니다.


(*참고도서 : '밴버드의 어리석음', '명료한 사고')

인퓨처컨설팅 & 유정식의 포스트는 아이폰 App으로도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폰에 inFuture App(무료)을 설치해 보세요. (아래 그림 클릭!) 
                            
inFuture 앱 다운로드 받기


  
,


퀴리 부부(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은 방사성 원소로서 안전장치 없이 다루면 방사능에 오염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30년대만 해도 라듐은 강장제나 건강용품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자신이 라듐의 피해자이기도 한 마리 퀴리(보통 퀴리 부인이라 불리는 여성 과학자)는 여러 차례 라듐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사용을 금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라듐을 향한 대중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미국의 백만장자인 어븐 바이어스라는 사람은 라듐 발견자의 경고를 듣고도 코웃음을 쳤다.

그는 라듐이 함유된 음료인 ‘라디토어’를 몇 년 동안 1,000병 이상 마셨으며, 그 음료가 젊음을 유지시키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는 5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때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이기도 했던 건장한 체격의 그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사망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라듐 중독이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과연 라듐이 만병통치약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서 아는 것은 분명 아니다. '안다고' 말하려면 당신은 그것을‘증명'해야 한다. 증명이라고 말하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판단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증명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증명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압박을 피하고만 싶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나 사실을 수학이나 과학으로 밝힐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증명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수학이나 과학의 도구의 사용해 증명 가능한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1 + 1 = 2임을 밝히려면 형이상학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간편한 도구인 수학을 사용해야 한다. 종교나 신화,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개똥철학을 먼저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와 형이상학적인 믿음으로 충만한 독자들은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믿음을 어떻게 수학이나 과학으로 증명하란 말인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신이 존재함을 모른다는 소리인가? 앎에 있어 수학이나 과학이 증명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수학이나 과학으로 모든 걸 증명할 필요도 없다.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는 “제안, 진술, 사실을 ‘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증거가 얼마나 타당하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바를 조리에 맞게 설명하고 이해시킴으로써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만들면 그것이 바로 증명이다. 나와 상대방이 함께 믿음의 상태로 이르도록 근거가 명확하게 제시된다면 증명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고차원적인 명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수동적이며 정적인 행위가 아니다. 무언가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도 아니다. 개똥지빠귀라는 새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이름이 우스꽝스러워서 기억해 뒀다고 해보자. 그러면 과연 그 새를 알고 있는 걸까?

우리는 보통 단지 그 새의 이름만 알 뿐인데도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곤 한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아, 나 그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앎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이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수 있어야 당신은 비로소 '아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