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나는 모두 8권의 책을 읽었다.
그래서 금년에 읽은 책은 총 33권이다.
5월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많고 혼란스러운 일이 많아 번다했는데,
그나마 책이 큰 위안이 되었다.

 책만 읽고 돈 벌 수 없을까, 헛된 망상에 젖어본다. ^^

생각이 직관에 묻다 : 직관(Gut Feeling)에 관한 재미있는 책. 직관은 충분한 정보가 없을 때 유용한 판단도구임을 흥미로운 사례와 더불어 설명한다. 강추하는 책이다.

갈릴레오 : 근대과학의 문을 연, 너무나도 유명한 갈릴레오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인간 갈릴레오의 고뇌가 책 전체에 묻어난다. 갈릴레오의 과학 성과가 좀더 자세히 설명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먼지 : 조그만 빈 컵 하나에서도 수만개의 먼지가 떠다닌다. 먼지가 없어도, 먼지가 많아도 인간은 살기 어렵다. 우주에서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먼지 속에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인간이 죽어서 먼지가 되면 우주의 역사로 순환될 게다. 교양과학책이지만 철학적 물음표를 던져 주는 책.

암호의 해석 : 암호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해독되는지 다양한 사례로 설명하는 책이다. 암호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는 책 내용이 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심있는 이에겐(또 그걸 활용하려는 사람에겐) 이 책은 '암호학'의 입문서가 되리라.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 이웃 블로거인 김희경님의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스페인의 순례길을 한달 간 걸으면서 접한 사람들 제각각의 고민과 작가 개인의 슬픔과 삶의 고단함이 뚝뚝 묻어나는 잔잔한 에세이다. 이 책을 읽고 산티아고를 동경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대단히 건조한 사람. 꼭 읽어 보길 권한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술이 생생하게 숨쉴 수 있음을,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 매혹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예술가들이 삶과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하나씩 들어가면서 어떻게 하면 예술이 일상의 틈새에서 빛나도록 만들까를 논한다. 약간 철학적인 문체지만 메모해 둘 내용이 많다. 강추한다.

춤추는 술고래의 수학 이야기 : 확률과 통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와 오류를 하나씩 짚어주는 교양수학책. 그렇다고 수식이 나오지는 않으니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 않아 흠이다.

리제 마이트너 : 퀴리 부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의 평전. 우라늄 방사선을 물리학적으로 해석한 공로로 충분히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파트너인 오토 한의 연구원으로밖에 인정 받지 못해 불운했던 사람이다.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자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삶을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제나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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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 부부(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은 방사성 원소로서 안전장치 없이 다루면 방사능에 오염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30년대만 해도 라듐은 강장제나 건강용품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자신이 라듐의 피해자이기도 한 마리 퀴리(보통 퀴리 부인이라 불리는 여성 과학자)는 여러 차례 라듐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사용을 금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라듐을 향한 대중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미국의 백만장자인 어븐 바이어스라는 사람은 라듐 발견자의 경고를 듣고도 코웃음을 쳤다.

그는 라듐이 함유된 음료인 ‘라디토어’를 몇 년 동안 1,000병 이상 마셨으며, 그 음료가 젊음을 유지시키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는 5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때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이기도 했던 건장한 체격의 그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사망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라듐 중독이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과연 라듐이 만병통치약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서 아는 것은 분명 아니다. '안다고' 말하려면 당신은 그것을‘증명'해야 한다. 증명이라고 말하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판단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증명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증명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압박을 피하고만 싶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나 사실을 수학이나 과학으로 밝힐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증명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수학이나 과학의 도구의 사용해 증명 가능한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1 + 1 = 2임을 밝히려면 형이상학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간편한 도구인 수학을 사용해야 한다. 종교나 신화,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개똥철학을 먼저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와 형이상학적인 믿음으로 충만한 독자들은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믿음을 어떻게 수학이나 과학으로 증명하란 말인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신이 존재함을 모른다는 소리인가? 앎에 있어 수학이나 과학이 증명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수학이나 과학으로 모든 걸 증명할 필요도 없다.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는 “제안, 진술, 사실을 ‘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증거가 얼마나 타당하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바를 조리에 맞게 설명하고 이해시킴으로써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만들면 그것이 바로 증명이다. 나와 상대방이 함께 믿음의 상태로 이르도록 근거가 명확하게 제시된다면 증명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고차원적인 명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수동적이며 정적인 행위가 아니다. 무언가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도 아니다. 개똥지빠귀라는 새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이름이 우스꽝스러워서 기억해 뒀다고 해보자. 그러면 과연 그 새를 알고 있는 걸까?

우리는 보통 단지 그 새의 이름만 알 뿐인데도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곤 한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아, 나 그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앎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이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수 있어야 당신은 비로소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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