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포스팅('벌금이 나쁜 행위를 오히려 조장한다?')에서 탁아소에서 아이를 늦게 찾아가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물렸더니 오히려 늦게 찾아가는 경우가 더 늘었다는 연구 사례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벌금이라는 금전적 장치가 아이를 늦게 찾아가는 미안함을 늦게 찾아가도 되는 권리로 치환시켜서 기대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 사례였죠. 오늘은 이와 비슷한 사례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2001년 12월 1일에 보스턴 소방본부는 소방관들에게 일수 제한 없이 유급으로 제공하던 병가를 최대 15일로 제한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만약 병가가 15일을 넘으면 그만큼 급여에서 공제하겠다는 것도 포함되었죠. 아마도 소방관들이 무제한 유급 병가라는 제도를 악용하여 아프지 않은데도 핑계를 대며 일을 게을리할까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제한을 가하면 실제로 소방관들이 사용하는 병가 일수도 줄어드리라 기대했겠죠.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고 나니 크리스마스와 신년 첫날에 병가를 신청하는 경우가 전년과 비교하여 10배나 증가했던 겁니다. 소방본부장은 소방관들이 꾀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명절 보너스를 폐지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소방관들은 총 13,431일 분의 병가를 신청했는데, 이는 전년도의 6,432일에 비하면 2배나 증가한 양이었습니다. 병가를 악용할까 염려되어 실시한 제도가 오히려 병가 사용을 늘리는 역효과를 일으킨 것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기본적으로 소방관들은 아프거나 다쳐도 공공의 안전을 위해 헌신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헌데 새로운 제도가 사회규범 하에 위치하던 소방관들의 마인드를 자신의 서비스를 돈을 받고 제공하는 시장규범으로 이동시켜 버렸습니다. 새 제도는 예전에는 몸이 아파도 출근하던 소방관들에게 조금만 아파도 15일까지는 병가를 써도 괜찮고 그게 시장규범 하에서는 당연하다는 엉뚱한 신호를 준 꼴입니다. 탁아소에서 아이를 늦게 찾아가면 안 된다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내면 아이를 늦게 찾아가도 미안할 것 없다는, 일종의 면죄부를 발부한 사례와 맥을 같이 합니다. 


통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을 유도합니다. 직원들을 믿지 않아서 생기는 댓가는 통제를 가함으로써 얻는 이득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뭔가 제한을 가하거나 벌칙을 부여하면 직원들이 '이제부터 조심해야겠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직원들이 어린 아이와 같다는, 계몽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런 통제 조치들은 성인으로서 직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시그널입니다. 극소수의 직원들이 보이는 일탈을 막겠다고 새로운 규정을 설계할 때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사회규범에 따라 움직이던 직원들을 돈의 왕래라는 시장규범에 움직이도록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원들을 믿지 않으면 직원들도 회사를 믿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려 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도 그냥 놔둬도 별 문제 없었을 것을 제한을 둔다든지 통제를 가한다든지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던 사례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공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논문)

Samuel Bowles, Sandra Polanía-Reyes(2009), Economic incentives and social preferences: substitutes or complements?,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Vol.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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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중독됐는가?   

2011. 9. 27. 09:13



지난 번 포스팅에서 에드워드 L. 데시의 '소마(Soma) 퍼즐' 실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실험은 퍼즐 과제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1달러를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내면의 동기'가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죠. 보상을 받으며 퍼즐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은 보상이 중단됐을 때 퍼즐을 하고 싶다는 동기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 실험의 시사점이었죠.

데시는동기부여에 어떤 요소가 큰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 소마 퍼즐 실험을 여러 가지로 변형해서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로 '벌'이나 '위협'이 동기부여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를 둘로 나누어 한 그룹의 피실험자들(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만약 소마 퍼즐 과제를 제대로 제 시간에 풀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아마도 학점을 적게 주겠다는 식으로 위협했겠죠. 그리고 다른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그런 위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벌이라는 위협을 받은 학생들은 퍼즐 과제를 잘 풀었습니다. 이 결과만 보면 위협이 성과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겠죠. 하지만 지난 번 실험처럼 학생들이 실험실에 소마 퍼즐과 함께 남겨졌을 때, 위협을 받은 학생들은 소마 퍼즐을 가지고 놀려고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벌을 주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내면의 동기가 크게 약화됐다는 증거죠.

이로써 보상이나 위협은 동기를 부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동기를 훼손시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신상필벌은 조직의 위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직원들 내면의 동기를 북돋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남발할 경우 그들의 동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맙니다.

두 번째 실험의 주제는 '경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을 시킬 때 동기가 크게 올라가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들과 겨루어야만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을 보이죠. 족구 게임을 할 때도 '내기'를 해야 내면의 동기가 상승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인지 조직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회사 내에서도 경쟁 방식을 동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나왔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 절반에게 소마 퍼즐 과제를 내주면서 앞에 앉은 실험조교(경쟁자 역할을 맡은)와 겨루어서 '승리'해야 한다고 목표를 부여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의 피실험자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실험조교와 나란히 앉아 퍼즐을 완성하도록 했죠.

경쟁자 역할을 맡은 실험조교는 매번 일부러 져주었기 때문에 피실험자들이 항상 승리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경쟁에서 매번 이기고도 내면의 동기는 경쟁 상황에 처하지 않은 피실험자들보다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쟁 상황이 끝나자 소마 퍼즐 과제가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겁니다. 보상이 중단됐을 때 퍼즐에 흥미를 느끼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겨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기'를 걸지 않으면 족구 게임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에 중독된 셈입니다.

세 번째 실험에서 사용된 조건은 목표 설정에 대한 '통제'였습니다. 데시는 첫 번째 그룹 학생들에게 어떤 퍼즐 과제를 풀 것인지, 그것을 얼마 동안 풀어낼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A 과제를 10분 안에 풀겠다"라고 정하게 한 것이죠. 그런 다음 두 번째 그룹 학생들에게는 첫 번째 그룹 학생들이 정한 대로 퍼즐을 풀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그룹은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한 것이고 두 번째 그룹은 타율적으로 지시를 받은 셈입니다.

이 실험은 여러분이 충분히 예상했을 겁니다. 자율적으로 퍼즐 과제와 제한시간을 결정했던 첫 번째 그룹 학생들이 (혼자 남겨졌을 때) 소마 퍼즐을 오래 가지고 노는 모습이 관찰된 것으로 보아 내면의 동기가 강화된 것이죠. 반면 두 번째 그룹 학생들은 그보다 못했습니다. 사실 두 그룹 모두 똑같은 과제, 똑같은 제한시간이 주어졌지만 자율이나 타율이냐에 따라 내면의 동기는 크게 영향 받았던 겁니다.

흔히 직원들은 상사의 지시가 불명확하거나 목표가 top-down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그만큼 일에 대한 의욕도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직원들을 방치하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되겠지만, 일일이 세부적으로 목표를 정해주고 통제를 가하는 '마이크로 매니징' 또한 직원들의 동기를 갉아먹는, 좋지 않은 행동이죠.

보상, 위협, 경쟁, 통제 모두 직원들의 동기를 고양하는 데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입니다. 데시는 특히 보상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좋은 길은 보상을 동기부여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보상이 잘된 일에 대한 인정이나 감사의 표시로만 보상을 사용해야 하지, 전면적인 성과주의 인사제도처럼 보상을 동기부여의 전략으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동기부여는 직원의 자율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면 아무리 긍정적이라 해도 내면의 동기를 발화시키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훼손시키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자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며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올바른 조직관리이자 직원관리가 아닐까요?

우리 기업이 보상, 위협, 경쟁, 통제에 중독되지 않았는지 뒤를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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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을 감시할까, 방임할까?   

2011. 8. 30. 10:40



캐슬린 콜브(Kathryn J. Kolb)와 존 아이엘로(John R. Aiello)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63명에게 기여한 만큼 학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이런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과제는 2가지였습니다. 주어진 6자리의 숫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라는 임무와 무작위로 주어지는 글자가 자음인지 모음인지를 구별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라는 임무였죠. 각 과제는 8분씩 진행됐습니다.

이 실험은 사무실처럼 꾸며놓은 장소에서 진행됐습니다. 콜브와 아이엘로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번째 그룹에게는 컴퓨터를 통해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니터링되고 측정된다는 말을 했고, 두번째 그룹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 감독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입회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다른 일로 바쁘다고 말하고 실험 장소를 떠난), 이렇게 두 가지 상황에서 이 실험을 진행했죠.

 

정리하면, 실험 조건은 다음과 같이 모두 4가지였습니다.

조건 1 : 컴퓨터로 모니터된다 & 감독자 입회
조건 2 : 컴퓨터로 모니터된다 & 감독자 없음
조건 3 : 컴퓨터로 모니터되지 않는다 & 감독자 입회
조건 4 : 컴퓨터로 모니터되지 않는다 & 감독자 없음

학생들이 주어진 과제를 모두 끝내고 나서 콜브와 아이엘로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통제 대상(Locus of control)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꼈는지에 관해 1점에서 7점의 척도로 응답하도록 했죠.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통제와 감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가'하는 것이었고, 특히 '컴퓨터를 통한 통제가 스트레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이랬습니다. 컴퓨터로 모니터링된다는 말을 들은 학생들은 자신이 감독자로부터 통제를 받을 때(즉, 조건 1일 때)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반면에 컴퓨터로부터 모니터링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학생들은 감독자의 통제를 받지 않을 때(즉, 조건 4일 때)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실험 결과는 컴퓨터로 모니터링될 때 감독자까지 통제와 감시에 가담하기보다는 감독자가 없는 게 낫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한 모니터링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시사점을 줍니다. 컴퓨터로도 감시하고 감독자로도 통제하는, 2중 조치가 더 나쁘다는 점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컴퓨터로 모니터링하지 않는 경우에 감독자가 없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낸다는 사실은 감독자의 존재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님을 시사합니다. 마치 감독이 퇴장을 당하여 선수들끼리 경기를 꾸려가야 할 때처럼, 감독자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업무를 수행할지 지침을 주지 않으면 우왕좌왕 하거나 완료한 일에 대해 스스로도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겠죠.

직원들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그들의 행동(심지어 생각까지)을 통제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조치를 너무 앞서 나가면(컴퓨터 모니터링 + 감독자), 당장에는 원하는 성과를 얻을지 모르지만 직원들의 심리를 압박하고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장기적인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말 겁니다. 반대로, 직원들의 창의력을 북돋울 목적으로 그들에게 지나친 자율권을 주거나 방임에 가까운 조치를 취한다면 이것 역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맙니다.

직원들을 통제하고 이끄는 데에 중용만큼 적절한 단어도 없을 겁니다. 적절히 통제하고 적절하게 이끌어야지, 효과가 좀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지나치게 방임하는 극단적 조치는 항상 새로운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직원 통제'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고 있습니까? 지나친 통제나 지나친 방임으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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