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차이가 있는 여러 대안 중 하나를 택하는 과정에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면 참가자 각자의 의견이 합쳐져 평균에 해당하는 대안이 선택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참가자들이 혼자서 결정할 때보다 집단의 의견이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런 현상을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라고 부릅니다. 집단 극화는 집단의 의사결정이 개인보다 낫다는 통상적인 믿음이 틀렸음을 지적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집단 극화는 어떤 조건을 가진 집단에서 잘 일어날까요?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우두머리가 집단을 통제하는 문화에서 집단사고와 집단 극화 현상이 강화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바입니다. 헤브루 대학의 일란 야니프(Ilan Yaniv)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첨가했습니다. 그는 160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집단의 동질성'이 높을수록 집단 극화 현상이 나타남을 밝혔습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학교 당국이 등록금을 6000세켈 인상하려 한다는 계획을 상상하게 하고 등록금 인상안을 협상하는 학생회장의 역할을 가상으로 맡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참가자들 절반에게 학교 측과 협상할 수 있는 2가지 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A안 : 4000세켈 인상
B안 : 1/3의 확률로 등록금 인상 없음. 2/3의 확률로 6000세켈 인상

나머지 절반의 참가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따지고 보면 같은 내용이지만 표현을 달리한 대안을 제시했죠.

A안 : 학교 측의 당초 인상안(6000세켈)에서 2000세켈 감면
B안 : 1/3의 확률로 6000세켈 전액 감면, 2/3의 확률로 감면 없음

보다시피 처음의 두 대안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손실 관점'의 대안이고, 아래의 두 대안은 '이득 관점'의 대안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은 동일하죠.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질문하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손실 관점'으로 질문을 던지면 A안보다는 B안을 선택함으로써 리스크를 수용하는 경향이 크고, 반대로 '이득 관점'으로 질문하면 확실한 이득을 취하려고 안전한 A안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커집니다. 이는 행동경제학의 선구자인 대니얼 카네만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에서 이미 밝혀진 바입니다.

야니프가 참가자들 각자에게 이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질문을 던지니, '손실 관점'의 대안을 받은 참가자들은 위험 회피적인 A안을 선호하는 정도가 2.85점(5점 만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득 관점'으로 대안을 제시하니 예상했던 대로 위험 회피적인 A안을 좋아한다는 대답이 3.51점으로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야니프는 동일한 관점의 대안을 받은 참가자들끼리 그룹을 이루게 한 다음에 다시 위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처음에 '손실 관점'으로 질문 받은 참가자들끼리 팀을 이루게 하여 '손실 관점'의 대안을 제시해 보고, 또 '이득 관점'으로 질문 받은 참가자들끼리 모아서 '이득 관점'으로 대안을 제시해 본 것입니다. 혼자서 결정을 내릴 때와 동일한 관점에 노출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정 내릴 때의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지 보기 위해서였죠.

그랬더니 '손실 관점'팀이 보수적인 A안을 선호하는 정도가 2.85점에서 2.50점으로 하락함으로써 리스크를 더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이득 관점'팀은 보수적인 A안을 선호하는 정도가 3.51점에서 3.86점으로 상승함으로써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최초에 동일한 관점에 노출된(framing) 사람들끼리 모아 놓으니 각각의 경향이 강화된 것입니다.

야니프는 비교를 위해 처음에 '손실 관점'으로 질문 받은 자들과 '이득 관점'으로 질문 받은 참가자들을 고루 섞은 후에 위의 두 가지 관점의 대안을 각각 제시해 봤는데, 어떤 관점의 대안을 제시 받든지 상관없이 비슷한 정도로 A안을 택했습니다. 다른 관점에 노출된 사람들을 모아 놓으니 처음에 가졌던 쏠림 경향이 크게 약화된 것입니다.

집단의 동질성이 높을수록 집단 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의사결정의 질도 떨어진다는 야니프의 실험은 의사결정기구의 멤버를 구성할 때나 단위조직의 직원을 구성할 때 필요한 실무적인 지침을 줍니다. 가능한 한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을 구성원으로 참여시켜야 한다는 점이죠. 그래야 구성원 각자의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고 나아가 집단의 의사결정 품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좋은 의사결정을 위해 여러 가지 정교한 방법과 절차를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집단 극화 현상을 중화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을 참여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쉬우면서도 더 근본적인 해법입니다.

참가자들의 출신이 다양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자연스레 동질성이 형성됩니다. 이런 동질성과 동료의식이 건전한 수준을 넘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만의 세상'이라고 인식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집단을 해체하고 다시 새로운 멤버로 집단을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집단 해체로 인한 비용(지식, 노하우, 생산성 등의 소실)을 최소화할 장치를 미리 가동시켜야겠죠.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집단 내 구성원들에게 역할과 책임을 서로 바꿔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관점에 고착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법도 필요합니다.

조직의 의사결정이 어느 한 극단으로 매번 쏠리는 경향이 발견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조직 구성원들로부터 충성심을 얻은 것에 대한 비용일지 모릅니다. 그 비용이 상당하다면 그 충성심이나 동질감은 환상일뿐만 아니라 조직의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 요소 중 하나입니다. 때에 따라 조직의 동질성을 파괴하기 바랍니다.


(*참고논문)
Group diversity and decision quality: Amplification and attenuation of the framing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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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참가자들 각자가 가진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서로의 생각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준비하고 이견에 대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타협의 지점을 사전에 탐색하기 위한 목적도 가집니다.

그러나 토론하기 전에 각자의 의견을 밝히는 과정이 토론을 통해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려는 의도를 망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아스 모이찌쉬(Andreas Mojzisch)와 스테판 슐츠-하르트(Stefan Schulz-Hardt)는 몇 가지 실험을 통해 토론 전에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지 말 것을 주장합니다. 모이찌쉬와 슐츠-하르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4명의 항공기 조종사 후보 중에 한 명을 뽑은 채용위원회의 역할을 부여하고 각자에게 후보자들에 관한 '서로 다른 정보'를 주었습니다. 각기 다른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후보자에 대해 다른 판단을 내리겠죠?



모이찌쉬와 슐츠-하르트는 참가자들을 둘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게는 위원회 내 다른 참가자들에게 '나는 누구를 채용하고 싶어하는지'를 말하도록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혼자만 알고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받았던 자료를 모두 주고 후보자의 채용 여부를 다시 판단하도록 요청했습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처음에 자신이 후보자들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새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재차 결정('후보 중 누구를 채용해야 하는가?')을 내려야 하겠죠.

하지만, 처음에 위원회 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은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최초에 내린 채용 결정이 불완전한 정보로부터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최초의 결정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기억 검사를 해보니 이 그룹의 참가자들은 후보자에 대한 관련 정보를 모두 받아 봤음에도 그 정보들을 잘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의 채용 의견을 알지 못했던 참가자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은 후에 제시된 정보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의미겠죠. 반면,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그룹의 참가자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후속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그들은 180명의 학생들을 3명씩 팀을 이루게 한 후에 3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을 채용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위 실험과 동일한 방식으로 채용 여부를 최종 결정하게 했습니다. 역시나 사전에 다른 이들의 의견을 공유한 팀은 그렇지 않은 팀에 비하여 최적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모이찌쉬와 슐츠-하르트에 의하면, 그룹 토론의 90퍼센트 이상이 각자의 의견을 서로 공유하면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 내에서 진행되는 토론도 비슷할 겁니다. 이 실험에서 보듯이 토론 전에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과정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견해를 수용하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최초 결정을 고수하도록 만들고 확보한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룹 토론을 벌일 때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멤버들이 자신의 의견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 좋은 의사결정의 팁이겠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부터 바로 실천해 보세요.


(*참고논문)
Knowing others' preferences degrades the quality of group deci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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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의견을 탐하라   

2012. 6. 1. 11:31


우리는 흔히 좋은 판단을 하려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근거 있고 더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이 좋지 않은 판단을 이끈다는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의사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이득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근거를 보강하려고 합니다. 대상이나 상황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가진 편향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상투적인 격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헤브루 대학의 일란 야니프(Ilan Yaniv)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어떤 음식을 보여주고 칼로리를 맞혀보라는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음식 이름을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칼로리 값을 쓰면, 곧바로 5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 음식에 대해 예상한 값이 컴퓨터 화면 상에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그 데이터를 보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예상값을 기입했죠. 야니프는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에게는 자신의 예상값을 최종 기입하지 말고 '당신과 짝지어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 음식의 칼로리가 얼마라고 예상할 것 같은가?'에 답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최종적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죠.



'자기 입장'에서 판단한 참가자들보다 '타인 입장'에서 판단한 참가자들이 최초 예상값을 더 많이 수정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자기 입장' 참가자들은 5명의 의견을 보고 나서도 최초값을 고수하는 경우가 50.3%에 달했지만, '타인 입장' 참가자들은 16.8%만 최초값을 유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도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전체적으로 '타인 입장' 참가자들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칼로리 값이 '자기 입장' 참가자들의 것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입장' 참가자들의 평균 절대 오차가 77.5였는데 반해, '타인 입장' 참가자들은 그 값이 62.8이었으니 말입니다.

간단한 실험이지만, '타인은 어떻게 판단 내릴 것 같은가'라 질문에 답한 값이 오차가 적었다는 사실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조언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어제의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실제에 가깝지 않은 판단을 내릴 위험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겠죠. 

이와 비슷한 실험이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Daniel T. Gilbert)에 의해 실시되었습니다. 길버트는 여학생들에게 특정 남학생과 5분간의 '스피드 데이트'를 실시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남학생과 데이트를 마친 첫 번째 여학생은 남학생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쓰고 그것을 100점 척도로 평가했습니다. 길버트는 두 번째 여학생을 초대하여 남학생의 프로필과 사진을 보여 주거나, 첫 번째 여학생이 남학생과의 대화에 대해 쓴 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 남학생과의 데이트가 얼마나 즐거울지 100점 척도로 예상해 보라고 했죠. 그리고 남학생과 5분간 데이트를 즐긴 후에도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데이트하기 전 남학생의 프로필을 본 경우보다 첫 번째 여학생이 남학생과의 대화에 대해 쓴 글을 본 경우에 더 정확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첫 번째 여학생의 의견을 참조할 때 오차가 49%나 줄어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여학생들 중 75%가 남학생의 프로필 정보를 볼 때 데이트의 즐거움을 더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게다가 84%의 여학생들은 미래에 만날 남자의 프로필 정보가 있으면 그 남자와의 데이트가 어떨지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도 믿었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해서 더 나은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라 타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정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기에 판단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타인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거나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가 실리적입니다. 여러 의견을 듣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 독선의 위험을 피할 줄 아는 현명한 의사결정자라는 점을 새기기 바랍니다. '네 이웃의 의견을 탐하라.' 뛰어난 의사결정자가 지켜야 할 계명 중 하나입니다.


(*참고논문)
- When guessing what another person would say is better than giving your own opinion: Using perspective-taking to improve advice-taking.

- The Surprising Power of Neighborly Ad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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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인상을 얻어내려면 차가운 커피 대신에 뜨거운 커피를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번 글의 후속편으로서 온도 뿐만 아니라 촉감이나 무게감 등도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MIT의 조슈아 애커만(Joshua M. Ackerman)과 동료들은 참가자들에게 어떤 후보의 역량을 평가하라고 하면서 평가지가 끼워진 클립보드를 나눠 주었습니다. 참가자들 중 절반은 무거운 클립보드(약 2 kg)를, 나머지 절반은 가벼운 클립보드(약 340 g)를 들고 평가에 임했는데, 무거운 클립보드를 사용한 참가자들이 후보자를 전반적으로 더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번엔 정부가 대기 오염 기준과 같이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와 공중목욕탕 규제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슈에 각각 예산을 배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가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역시 참가자들은 둘로 나뉘어 가벼운 클립보드와 무거운 클립보드를 사용해야 했죠. 그랬더니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거운 클립보드를 든 남성들이 가벼운 클립보드를 쓴 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했습니다. 

반면, 여성들은 클립보드 무게와 상관없이 사회적인 이슈에 배정 가능한 최대의 예산을 부여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남성이 손으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추측되는 결과입니다. 중요한 이슈에 관해 결재나 승인을 받아내야 하는 상대방이 남자라면, 무거운 물건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는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무게가 아니라 감촉은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애커만은 참가자들에게 다섯 조각으로 된 퍼즐을 완성하도록 했는데, 참가자 중 절반에게는 매끈매끈한 원래 상태의 퍼즐을, 나머지 절반에게는 표면이 사포로 되어 있어 까끌까끌한 퍼즐을 나눠 주었습니다. 퍼즐을 끝낸 참가자들은 사회적인 관계를 표현한 글을 읽고 느껴지는 인상을 평가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거친 감촉을 느낀 참가자들은 부드러운 퍼즐을 사용한 참가자들보다 글에서 나타난 사회적 관계가 덜 조화롭다(어렵고 힘겹다)고 생각한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복권을 사용하여 최후통첩게임을 하도록 하자 거친 퍼즐을 만졌던 참가자들이 게임 상대방에게 더 많은 복권을 제시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거친 감촉이 상대방을 거친 사람으로 인식케 하여 참가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복권을 제시하도록 은연 중 유도했다는 의미입니다. 협상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조건을 제시 받고 싶다면,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면, 사전에 거친 사포를 만지게 하는 것이 유리할지 모릅니다.

딱딱하다는 느낌도 역시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후속실험에서 밝혀졌습니다. 애커만은 마술사의 마술을 보고 비법을 추측해보라고 요청하면서 마술에 사용된 물건에 이상한 점이 있는지 참가자들에게 직접 만져보라고 했습니다그 후 참가자들은 상사를 대하는 부하직원의 성격을 평가해야 했는데, 딱딱한 나무 블럭을 만졌던 참가자들은 부드러운 천 조각을 만진 참가자들에게 비해 부하직원을 융통성 없고 엄격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무게감은 중요성과 심각성에, 거침은 조화성에, 딱딱함은 융통성과 유연성에 대한 판단에 각각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애커만이 실행한 일련의 실험들은 손으로 느껴지는 여러 촉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신호로 인식하도록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객관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거나 그저 갖다 붙이기 좋은 클리셰(cliche)에 불과한 말이라고 인식해야 할 겁니다. 여러분이 오늘 중요한 평가나 결재를 앞두고 있다면 상대방에게 어떤 촉감을 느끼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것도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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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일이 코 앞에 다가왔을 때 일이 더 잘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압박이 가해질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결과물의 품질이 높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도 일부러 마감일까지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주장하기도 하죠. 하지만 시간의 압박이 판단과 의사결정의 질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결과물의 품질도 저하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는 점을 안다면 그런 믿음은 그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깨달을 겁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시간의 압박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에게 아이오아 갬블링 태스크(Iowa Gambling Task)라고 불리는 게임을 수행하게 한 마테오 셀라(Matteo Cella)와 동료들의 실험입니다. 이 게임은 컴퓨터 화면 상에 카드 데크 4개를 보여주고 하나의 데크에서 한 번에 한 장의 카드를 선택하게 합니다. 한 장을 뽑을 때마다 돈을 딸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데, 4개의 데크 중 2개는 한 번에 따는 돈이 컸지만 그만큼 잃는 돈도 컸습니다. 나머지 2개의 데크는 따는 돈이 적은 대신에 잃는 돈도 적었죠. 그래서 이 게임에서 충분히 많은 수의 카드를 뽑아야 할 경우 '저수익 저위험' 데크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하고 그 데크에서 카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런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게임을 임한 참가자들은 카드를 한 장씩 뽑아가면서 이런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데, 셀라는 카드를 빨리 뽑으라고 압박을 가할 때와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을 때 참가자들이 돈을 따는 데에 유리한 데크를 얼마나 빨리 깨닫는지 보고자 했습니다. 셀라는 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에게는 카드를 2초 안에, 두 번째 그룹에게는 4초 안에, 세 번째 그룹에게는 시간 제한 없이 카드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시간 안에 카드를 뽑지 못하면 화면에 "너무 늦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게 하여 참가자에게 부담을 주었죠.

모두 100장의 카드를 뽑도록 한 후에 결과를 살펴보니, 모든 참가자들이 카드를 많이 뽑을수록 '좋은 데크'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은 참가자들이 2초 안에 카드를 뽑아야 했던 참가자들보다 '좋은 데크'에서 카드를 더 많이 선택했습니다. 반면 4초 그룹과는 차이가 없었고, 2초 그룹과 4초 그룹 사이에서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는 '2초 내'라는 시간 압박이 참가자로 하여금 '좋은 데크'가 무엇인지 늦게 깨닫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하지만 '4초 내'라는 제약은 참가자들에게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았음을 의미). 시간의 압박이 가해질 때 판단의 질이 떨어진다는 점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동일한 시간 제약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 시간을 압박으로 여기도록 하느냐의 여부도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또 다른 실험으로 규명되었습니다. 마이클 드돈노(Michael A. DeDonno)와 동료들은 셀라의 실험과 동일한 방법을 따르되 참가자들에게 2초라는 시간 제약을 다르게 느끼도록 했습니다. 모든 참가자들은 각 카드를 2초 내에 뽑아야 했지만, 드돈노는 첫 번째 그룹에게 2초라는 시간이 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일러준 반면, 두 번째 그룹에게는 2초라는 시간이 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알려줬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시간을 서로 다르게 인지하도록 한 후에 100개의 카드를 뽑도록 하니, 결과에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간이 충분하다고 인지한 그룹이 그렇게 인지하지 않은 그룹보다 '좋은 데크'에서 더 많은 카드를 선택했습니다. 똑같은 시간 제한이라도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 드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역시 판단과 의사결정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였죠.

두 실험의 결과를 통해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할 때와 상대적으로 시간적 압박을 느낄 때 모두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감일이 다 될 때까지 일을 미루는 것이 생산성과 결과물의 질을 높이기 위한 좋은 전략이 아닐뿐더러, 다른 이에게 시간적 압박을 가해야 보다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 헛된 기대라는 점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 마감일이 닥쳐서 일을 해야 일이 잘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집중이 잘 된다는 느낌을 받을지는 몰라도 결과물의 질은 시간 여유를 가질 때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들은 조직의 의사결정 관행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내외부 환경이 급변할수록 직원들에게 빠른 판단과 빠른 행동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조직 전체에 순식간에 퍼집니다. '빨리빨리'가 직원들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 버리면 빨리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의사결정의 목표로 둔갑하고 맙니다. 시간의 압박을 뚫고 나온 전략이나 제도는 빠른 시간 안에 수립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할지 몰라도 그 수립 과정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기회를 비용을 치렀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둘러 마련한 전략이 삐걱거리거나 실패로 끝날 때 매우 촉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적어도 한번쯤 차근차근 점검할 기회가 있었다고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냐의 여부는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주는 압박을 압박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냉철함에 있습니다. 과감한 의사결정일수록 시간적 압박의 결과물은 아닌지 찬찬히 뒤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논문)
Effects of decision-phase time constraints on emotion-based learning in the Iowa Gambling Task.
Perceived time pressure and the Iowa Gambling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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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15년 전쯤 방영되었던 역사 대하 드라마를 케이블 TV에서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물인데도 15년이라는 세월이 화면에서 여실히 느껴지더군요. 등장인물들의 대화 내용은 고어체라서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시청하는 동안 내내 화면 전환 속도와 대화의 흐름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이 대화를 마쳐도 바로 다른 사람에게 화면이 넘어가지 않았고 대화 사이의 공백도 길었습니다. 배우들이 말하는 속도도 왠지 느리기만 해서 어색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더군요.

그 이유는 진행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요즘 TV 프로그램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죠. 상황의 분위기와 배우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프로그램의 낮은 질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화면을 빠르게 전환시키는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심지어 시사 교양 프로그램들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 동승한 듯 합니다. 가뜩이나 TV가 시청자로 하여금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빼앗아 바보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지금처럼 1~2초에 한번 이상 바뀌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특히 뮤직 비디오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심함) 진짜로 바보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환경이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천천히 흘러가는 환경에 놓일 때보다 리스크가 큰 결정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제시 챈들러(Jesse J. Chandler)와 에밀리 프로닌(Emily Pronin)는 사람들이 생각의 속도를 빠르게 하도록 요구 받는 상황에 처하면 리스크 수용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실험을 통해 규명했습니다.

그들은 컴퓨터 스크린 상에 "가스 스토브 위에 불씨가 계속 타오르고 있다."와 같은 문장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하고 참가자들에 크게 소리를 내어 따라 읽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문장을 느리게 보여주면서 따라 읽으라고 지시했죠. 여러 문장을 읽은 다음, 참가자들은 '풍선에 바람 넣기'라는 컴퓨터 게임에 임했습니다. 화면의 풍선을 여러 번 클릭하여 부풀어 오르도록 만드는 게임이었는데 과도하게 클릭하면 풍선이 터져 버려서 풍선 하나에 5센트씩 설정된 상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게임 결과, 문장을 빠르게 읽은 참가자들이 느리게 읽은 참가자들보다 풍선을 더 많이 터뜨렸고 평균 클릭수도 더 많았습니다(26.6회 대 20.6회). 빠르게 문장을 읽다보니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고 그 때문에 좀더 리스크가 큰 행동을 보였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효과를 재차 검증하기 위해 챈들러와 프로닌은 세 그룹의 학생들에게 화면 전환 속도가 다른 세 개의 동영상을 각각 보여준 후에 향후 6개월 이내에 리스크가 큰 여러 가지 행동들을 얼마나 할 것 같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화면 지속 시간이 0.75초에 불과하여 화면 전환 속도가 매우 빠른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은 마리화나 흡연, 술 마시기 게임, 콘돔을 쓰지 않은 성관계 등과 같이 리스크가 큰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참가자들은 느린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에 비해 리스크가 큰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덜 부정적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이 또한 환경의 변화 속도가 생각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의 빠른 속도는 리스크가 큰 행동을 유도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길들여질수록 리스크가 큰 행동을 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규명한 이 연구는 조직 구성원들의 행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금융시장의 변화, 정부 정책의 변화, 경쟁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등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급박하게 변할수록 직원들은 좀더 빠른 사고와 빠른 행동을 요구 받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구성원들이 찬찬히 앉아 상황을 숙고하거나 자료를 충분히 살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이 실험의 결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직원들의 경쟁 마인드를 고양하고 일하는 속도를 높여 빠르게 변하는 환경을 대처하겠다는 의도가 지나치면,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고 실패할 경우 손실이 큰 프로젝트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경계해야 하겠죠. 

상황 변화에 부화뇌동하려는 심리를 누르고 차분한 시선으로 환경을 조망하고 불확실성을 찾아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복잡하고 돈 많이 드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효과적일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생각 속도가 빨라지고 급박해진다고 느껴진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10분 정도 산책이라도 해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발생시킨 리스크가 언젠가 우리의 목을 죄어오지 못하도록 만들려면 말입니다.

생각의 속도를 늦추세요.


(*참고논문)
Fast Thought Speed Induces Risk T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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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독(毒)이다   

2012. 4. 26. 09:00


샐리라는 아이가 사탕을 상자 안에 넣은 다음 방에서 나갑니다. 샐리가 없는 동안 누군가가 들어와 상자에서 사탕을 꺼내 바구니로 옮겨 놓은 후 사라집니다. 샐리가 돌아오면 상자와 바구니 중 어디에서 사탕을 찾으려 할까요? 당연히 상자를 먼저 들여다 볼 겁니다. 하지만 4살 미만의 아이들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면 샐리가 바구니에서 사탕을 찾으려 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누군가가 사탕을 옮겨 놓았다는 것)을 샐리도 알고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것이죠.

헌데 이런 현상이 비단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습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자기가 아는 정보로 인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지식의 저주'에 빠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의 수잔 비르히(Susan A.J. Birch)와 예일 대학의 폴 블룸(Paul Bloom)은 155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경고합니다.



비르히와 블룸은 참가자들에게 짧은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방 안에는 파란색, 빨간색, 보라색, 녹색의 상자가 있다. 바이올린 연습을 끝낸 '비키'라는 여자아이가 바이올린을 파란색 상자에 넣은 후에 밖으로 놀러 나갔다. 비키가 없는 사이에 동생인 데니스가 들어와서 바이올린을 다른 상자로 옮겼다. 그런 다음, 모든 상자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비키가 방으로 돌아와 어느 상자에서 바이올린을 찾을 것 같은지 각 확률을 써보라." 데니스가 상자의 위치를 바꾸기 전의 모습과 바꾼 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아래 링크의 논문)



(출처 : 아래 링크의 논문)



참가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1그룹은 위와 동일한 설명을 들었고, 2그룹은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빨간색' 상자로 옮겼다는 설명을, 3그룹은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보라색' 상자에 옮겼다는 설명을 전달 받았습니다. 1그룹에겐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어느 상자로 옮겼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2그룹과 3그룹에게 비키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준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데니스가 네 상자의 위치를 뒤섞을 때 원래 파란색 상자가 있던 자리에 빨간색 상자를 놓았다는 점을 알았지만, 그 의미는 2그룹에게 특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왜냐하면 2그룹은 데니스가 빨간색 상자로 바이올린을 옮겼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반면, 3그룹은 파란색 상자의 원래 위치와 보라색 상자의 새 위치 사이에 전혀 관련이 없었기에 2그룹과 같은 의미를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참가자들이 적어낸 확률을 평균해 보니,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어디로 옮겼는지 듣지 못한 1그룹(일종의 대조군)은 비키가 파란색 상자를 제일 먼저 확인할 확률을 71%, 빨간색 상자를 가장 먼저 확인할 확률을 23%로 보았습니다. 3그룹의 학생들도 이와 비슷한 확률을 제시했습니다(파란색 상자 73%, 빨간색 상자 19%). 하지만 2그룹의 학생들은 다른 그룹과 확연한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비키가 파란색 상자를 먼저 확인할 확률을 59%, 빨간색 상자를 먼저 꺼내볼 확률을 34%로 보았습니다.

1그룹과 비교하면 2그룹의 판단이 편향되었음이 금세 드러납니다. 비키는 분명 파란색 상자에 바이올린을 넣고 밖에 나갔기에 그 상자의 색깔을 기억할 겁니다. 물론 기억 못할 수도 있어서 파란색 상자가 원래 있던 위치에 놓여진 빨간색 상자를 제일 먼저 확인할지도 모릅니다. 1그룹은 비키가 이렇게 상자 색깔을 기억 못할 확률을 23%으로 본 반면, 2그룹은 34%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는 바이올린이 실제로 들어있는 상자가 빨간색 상자임을 안다는 것이 2그룹 학생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2그룹의 학생들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비키의 입장이 되어 1그룹과 비슷한 확률을 추정해야 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영향을 받아 확률을 부풀려 생각한 것이죠. 그야말로 '지식의 저주'가 단적으로 나타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조직 내외부적으로 상황이 매우 모호하게 흘러갈 때 상황을 설명해주는 지식이 주어지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곤 하지만, 그 지식으로 인해 실제 수준보다 가능성을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판단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위의 간단한 실험이 이를 일깨워 줍니다. 여기에 본인이 보고싶어 하는 것만 근거로 채택하려는 확증편향까지 더해지면 지식의 저주는 우리의 눈에 안대를 씌우고 판단 실패라는 절벽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판단은 항상 어떤 요인에 의해 편향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의사결정자의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기 이전에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참고논문)
The Curse of Knowledge in Reasoning About False Beli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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