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포기할 권리가 있다   

2008. 9. 22. 14:48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가 조언을 구한다며 꺼낸 이야기는 진정한 포기란 용기이고 자기기만으로부터의 자유임을 깨닫게 했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에서 수년 째 박사 후 과정(Post-Doc.)으로 실험실에 머물러 있다. 남들은 길어야 1 ~ 3년이면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교수나 연구원으로 임용되곤 하는데, 그가 여전히 그곳에 머무는 이유는 그가 설정한 목표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연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다. 논문 여러 개를 충분히 쓰고도 남을 연구 결과를 폐기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독려하는 이유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얻어야 논문을 쓸 수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기 때문인 듯하다.

(사진 : 유정식)


그의 집념은 그 자체로 존경스럽다. 좀 더 높은 목표로 다가가려는 의지는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수년 째 가족들과 떨어져서 그 같은 생활을 지속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연구에 매달리는 모습을 과연 아름다운 눈으로만 볼 수 있을까?

진심으로 그가 과학계를 뒤집어 놓을 연구 성과를 원한다면, 적절한 수준의 논문으로 대학 교수나 기업체 연구원에 임용된 다음에 해도 충분하지 아닐까? 혹시 그는 스스로 ‘결코 포기하지 말자’는 검은 안대를 쓴 채 자신을 기만하는 건 아닐까? 그가 학자로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때론 목표 자체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세운 목표는 그 자체로 숭고하기 때문에 목표를 포기하라는 말이 어불성설로 들릴지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려는 목표를 포기해 버렸다면 어찌 됐겠는가? 다른 누군가가 후에 발견했겠지만 과학의 발전은 그만큼 지체됐을 것이다. 목표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라면 인류의 번영을 이끈 수많은 업적이 과연 이룩됐겠는가?

그런데 목표를 포기하라고? 하지만 그 목표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삶을 구속한다면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한다. 자신이 쏟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양질’의 노력이어야 한다.

당신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흰 종이 위에 그 목표를 써 보라. 그런 다음,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나열해 본다. 정리가 되면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욕망, 능력과 처지, 주변 사람들의 바람 등을 냉정하게 질문에 답해 보라. 능력보다는 욕망이 앞서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인 목표에 인생을 올-인하고 있는가?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 사람의 기대 때문에 그 길을 걷고 있는가? 정말 그 길 밖에는 없는가?

다음의 표가 당신이 포기할 때를 알려주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당신이 세운 목표가 무엇이든 다음의 질문을 던지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

 

1.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는가?

2. 그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가?

3. 포기해서는 안돼라는 말이 인사치레처럼 느껴지는가?

4. 타인의 기대나 강요 때문에 세운 목표인가?

5. 남들 보기에 근사할 거라 생각되는 목표인가?

6. 실패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멈추는 경우가 잦은가?

7. 능력에 한계를 느껴 자주 좌절을 느끼는가?

8. 달성하고 싶은데, 마음만 그럴 뿐 몸이 따라 주지 않는가?

9. 포기할 경우 남들이 조롱할까 두려운가?

10.주변사람(가족 등)의 희생이 필요한가?

11.달성할 때 얻게 될 이익보다 지금껏 쏟은 노력이 더 큰가?


위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개수가 4개 이하이면, 목표 자체를 포기하지 말고 잘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 5 ~ 7개이면 진지하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라. 만일 8개 이상이면, 당신은 반드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권리이며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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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이제 그만 포기하자   

2008. 6. 26. 18:43

포기하지 않는 삶은 아름답다. 어떠한 위기와 시련이 찾아와도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마침내 성공을 일궈내는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는 많은 위업들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가 흘린 피와 땀의 결과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심판’을 보고 있노라면 극심한 통증을 이겨낸 미켈란젤로의 숭고한 열정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후의 심판' (C)유정식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때때로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때 그렇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두 개로 나뉜다. 특수상대성 원리는 1905년에 완성을 했으나, 일반상대성 원리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15년에야 비밀이 풀렸다.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10년 간의 기간은 그에게 있어 매우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물리학은 수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물리학적 발견은 수학의 기반 위에서 성립한다. 그가 10년 간의 학문적 시련에 휩싸인 이유는 수학을 멀리 하고 물리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자신의 본능적인 직관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식이 아니라 가상의 스토리를 통해 문제를 풀던(이를 '사고실험'이라고 함), 독창적인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방법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일반상대성 원리를 향한 수년 간의 실패 끝에 자신이 붙잡고 놓지 않았던 직관을 폐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물리학적 전략을 버리고 수학적 전략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때가 1915년 10월이었고, 그 후로 겨우 한 달 만에 일반상대성 원리는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포기하자마자 성공에 다다른 것이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사고체계를 과감히 탈피해 ‘생각의 자유’를 회복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포기 = 자기기만으로부터의 자유


인생에 있어 의미 있는 포기란, 자기기만(自己欺瞞)을 버리고 자유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분명 있다. 손에 닿을락말락 조금만 더 하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좌절하고 마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신념과 편견이 무엇인지 성찰해 본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의미 있는 포기란, 목표에 다가가려는 자신의 등에 업혀 있는 거짓신념, 고정관념, 편견을 하나씩 끌어 내리는 것이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걸 다 가지고 가려 한다면 목표는 늘 안개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때론 목표 자체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 1854년에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가 쓴 자전적 소설 ‘녹색의 하인리히’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의 삶이 쓸쓸히 몰락하는 과정을 날카롭게 다룬다. 누명을 쓰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그는 화가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화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캔버스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힘겹게 그린 그림은 일반인들도 충분히 그려내는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는 절망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그를 막은 것은 “처음엔 누구나 그래. 조그만 더 열심히 하면 돼” 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주변의 격려였다. 하인리히의 어머니는 미술상에게 아들을 맡기면서 재능을 키울 것을 독려했다. 수업료나 챙길 요량이었던 미술상은 그림의 기초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그려 온 하인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했다.

그는 능력의 한계를 잘 알면서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남들의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좌절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속이는 말로 다짐을 한다. ‘그래, 이렇게 열심히 하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이 뛰어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기만의 말로 인생 전체를 기만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보내 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며 빚더미에 허덕이던 그가 잘못을 깨닫고 화가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였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있었다. 그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절망하고 만다. 하인리히는 재능 없는 화가로서 많은 세월을 허송하다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조그만 관리직을 수행하던 중 쓸쓸히 사망한다.

내게는 10년 가까이 사법고시에 매달려 있는 친구가 있다. 될듯될듯 하면서 낙방할 때마다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라며 상투적인 조언을 하는 내가 어쩌면 그를 절벽으로 내모는 건 아닌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용기 있는 조언자라면, “그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네 자신을 속이지 말고 포기하렴.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 줘야 옳다. 하지만 나나 그 친구나 선뜻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매몰비용(sunk cost)의 오류’ 때문이다.

이 말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너무나 많은 비용이 손실돼서 포기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투자하는 걸 일컫는다. 도박으로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이 쉽게 도박판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면 말이다.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아 버리는 자기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이 목표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게 하기 때문이다. 버거운 거짓목표를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도박판을 정리하고 나오려면 본전을 회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과감히 발길을 끊어야 한다.

선택을 잘 하려면 포기를 ‘잘’ 하는 것이다. 매몰비용 따위는 잊어라. 목표가 없는 삶보다 허황된 목표에 돌진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  포기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떳떳한 삶이 의미 있는 건 아니겠는가? 진정한 포기는 비겁함이 아니라 삶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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