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하는 일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또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생계를 위한 목적 외에는 그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삶의 낙오자가 된 듯한 열패감이 휩싸일 겁니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한 매개체이자 자아실현의 표현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정'과 '일의 의미'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일을 수행하려는 동기를 구축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두 요소가 옅어지거나 사라질 때 직원들의 생산성은 현저하게 하락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정과 일의 의미라는 두 가지 동기 요소와 '유보 임금(reservation wage)'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요? 유보 임금이란 직원들이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으로 받으려는 임금 수준을 말합니다. 상사나 동료로부터 자신의 업적을 인정 받지 못하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가?'라며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 직원은 자신이 '최소한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임금의 크기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정 받고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비해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행동경제학자인 댄 애리얼리(Dan Ariely)와 동료들은 업적을 인정 받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유보 임금이 더 클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MIT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실험은 글씨가 적힌 한 장의 종이를 주고 연속해서 s가 두 번 나오는 경우를 10개씩 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첫 페이지를 완성하면 55센트를 주었고, 두 번째 페이지를 끝내면 50센트를 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 페이지씩 과제를 완성하면 수고료가 5센트씩 줄어들도록 했는데, 학생들은 언제든지 일을 그만하겠다는 표현을 실험진행자에게 할 수 있었죠.

학생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애리얼리는 학생들을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인정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페이지를 건네 받을 때마다 상단에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했고 나중에 검사를 실시하기 위해 폴더에 보관하겠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무시 그룹'의 학생들은 이름을 쓰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거니와 과제를 완료한 이후에 한쪽 구석에 쌓아 놓기만 할 뿐 연구자들이 따로 검사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죠. 마지막으로 '세단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실험진행자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상황에 처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과제를 완료할 때마다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문서세단기에 밀어넣었기 때문이었죠. 자신이 애써 수행한 일이 잔인하리만큼 무시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했던 겁니다.

실험 결과, 인정 그룹의 학생들이 완료한 일의 양이 9.03페이지로 가장 많았습니다. 무시 그룹과 세단 그룹은 각각 6.77페이지와 6.34페이지였죠. 노동의 결과가 무참히 잘려나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세단 그룹의 학생들이 가장 먼저 포기를 선언했던 것이죠. 이로써 각 그룹의 유보 임금 수준은 애초에 세웠던 가설과 반대라는 점이 확실해졌습니다. 따져 보면 인정 그룹의 유보 임금은 14.85센트인 반면, 세단 그룹은 그 두 배에 달하는 28.29센트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노력을 올바르게 인정 받지 못할수록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결과입니다.

애리얼리는 '일의 의미'가 생산성과 유보 임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속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실험 참가자인 하버드 대학 학부생들에게 바이오니클(Bionicle)이라 불리는 레고 블럭을 조립하도록 하고 처음 완성하면 2달러를 주고 그 다음 회부터는 매회 11센트씩 깎아서 지급하겠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학생들을 몰래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의미 그룹'의 학생들은 바이오니클 하나를 완성하면 책상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고 실험진행자로부터 새로운 세트를 건네 받았습니다. 이 학생들은 노동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죠. 반면 '시지푸스 그룹'에 속한 학생들은 말 그대로 시지푸스처럼 무의미한 반복 작업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처해야 했습니다. 바이오니클을 만들자마자 실험진행자가 냉정하게도 그것을 바로 부수어버리고 다시 만들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실험 결과, 의미 그룹의 학생들은 평균 10.6개의 바이오니클을 완성했지만, 시지푸스 그룹의 학생들은 7.2개 밖에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빨리 포기를 선언했다는 말이죠. 의미 그룹은 수고료 수준이 1.01달러가 될 때 그만하겠다고 말한 반면, 시지푸스 그룹은 1.40달러일 때 두 손을 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지푸스 그룹의 학생들이 그만큼 자신의 유보 임금을 40% 높게 설정했음을 뜻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성과를 달성했더라도 그게 자신과 조직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지 못할 때, 생산성이 저하되는 반면 유보 임금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현상을 이 실험이 확실하게 규명해 준 셈이지만, 이로써 인정 받고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더 많이 기여한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지 못한 직원들은 비자발적으로 돌아서서 동일한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유보 임금을 주장하겠죠. 임금 수준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쩌면 그 불만은 '무인정'과 '무의미'에 지치고 소외 받은 직원들이 그 상실감을 돈으로나마 보상 받으려는 자연스러운 심리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릅니다.

진정한 성과관리는 직원들에게 밀착하여 목표를 끊임없이 각인시키고 행동을 수정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이룬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그 성과가 개인의 발전과 조직의 대의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인식케 하는 일임을 이 실험의 결과가 시사합니다. 직원이 현재의 업무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일이 KPI를 수립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단순하게 목표 세우고 평가해서 줄을 세우는 것은 성과관리가 아니라 무미건조한 측정에 불과합니다. 측정보다는 사기 진작에 초점을 맞춰 성과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임금을 제법 괜찮게 주는데 이상하게도 줄어들지 않는 불만을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논문)
Man’s search for meaning: The case of Le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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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경쟁을 강화하면 성과가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쟁이 개인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유도하고 크고 작은 혁신을 가속화시키며 적은 비용으로 높은 성과를 창출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조직 성과가 지지부진하거나 조직의 활력이 저하된 원인을 구성원들의 경쟁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기존 제도의 느슨함에서 찾습니다. 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평가제도와 보상제도를 변경하면 개인과 조직의 성과가 향상되리라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는 언뜻 보면 논리적인 것 같지만, 경쟁이 야기하는 현실은 추구하는 바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크리스티아네 쉬비에렌(Christiane Schiwieren)과 린쯔 대학의 도리스 바이히셀바우머(Doris Weichselbaumer)는 미로 찾기 게임을 통해 경쟁의 강화가 성과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것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은 30분 동안 컴퓨터 모니터상에 차례로 나타나는 여러 개의 미로 게임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죠. 게임 화면 내에는  '경로 자동 찾기'와 '경로 확인'이라는 버튼이 있었는데, 일부러 참가자들의 부정행위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연구자들은 얼마나 많은 미로를 풀었는지 참가자들 스스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컴퓨터에는 참가자들의 행동을 모니터하기 위한 스파이 웨어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부정행위가 감시되었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미로를 풀었는지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죠.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각각 두 가지 보상 조건 하에서 미로 게임을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는 '낮은 경쟁 조건'이라서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미로 게임 하나를 풀 때마다 30센트씩 받았습니다. 반면 '높은 경쟁 조건'은 토너먼트를 벌여서 오직 1등인 자만이 미로 게임 하나에 대해 1.8유로씩 받을 수 있는 '승자 독식'의 구조였죠.

실험 결과, 참가자들이 높은 경쟁 조건 하에서 더 많은 미로 게임을 푼다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일 때보다 높은 경쟁 조건일 때 2.7개 정도 적게 풀었습니다(여자들은 거의 차이가 없었음). 경쟁을 강화한다고 해서 성과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부정행위의 빈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참가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에서는 자신이 실제로 푼 개수보다 1.31개를 더 풀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을 강화하니 그 개수 차이가 2.91개로 늘어났죠. 연구자들은 높은 경쟁 조건일 때 특정 참가자가 문제를 하나 이상 더 풀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할 확률이 31%에서 39%로 늘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경쟁의 강화가 부정행위와 속임수의 증가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죠.

그런데 남녀 차이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부정행위의 빈도가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남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에서 높은 경쟁 조건으로 바뀌면 부정행위의 비율이 줄어든 반면(48%에서 28%로), 여자들은 부정행위의 비율이 29%에서 60%로 크게 상승했던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실험에 참가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평균 5~8개 정도의 미로 게임을 더 풀었습니다. 이 차이가 미로 게임을 푸는 남녀 간의 유전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들은 이런 류의 게임에 약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여자들 스스로 위축됐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연구자들은 추가분석을 통해 여자라는 이유로 경쟁이 강화된 상황에서 부정행위를 더 많이 범하는 게 아님을 규명했습니다.

쉬비에렌과 바이히셀바우머는 경쟁이 강화되면 성공의 기회를 손에 잡기가 어려운 저성과자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부정행위나 속임수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결론 내립니다. 또한 스포츠처럼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실력 차이가 거의 비슷할 경우에도 조그만 부정행위가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때문에 역시 부정행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어쨌든 경쟁은 승자가 되기 위해 양심을 버리는 행위를 합리화('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식)하는 부작용을 낳고 맙니다.

경쟁은 개인의 성공을 강조하기에 조직에 기여하려는 동기를 약화시키고 공정한 룰을 지키려는 의지도 희석시킵니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동원되는 수단의 정당성은 일단 이겨야 한다는(혹은 '일단 체면은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합리화에 의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경쟁이 개인의 성과를 높이는 장치로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점과 원치 않는 부정행위를 장려(?)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쟁은 바람직하다는 단선적인 생각은 이제 버릴 때가 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고논문)
Does competition enhance performance or cheating? A laboratory 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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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같이 일할 한 명의 팀원을 새로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죠. 이력서를 들여다 봐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테스트를 해 봐도 그 지원자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헌데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여러분의 팀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이고 여러분은 지금까지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가장 뛰어난 직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여러분은 조직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지원자에게 악수를 청할까요?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아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라면 그 지원자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솔직하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새로 채용할 교수가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둔 사람이라면, 신규 채용된 사람과 협업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새로 들어올 교수가 자신이 이미 거둔 업적을 초라하게 만들고 앞으로 이룰 업적을 갉아 먹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을 '사회적 비교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강점 영역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존감을 보호 받으려는 자연스러운 동기에 의해 발생하는 편향입니다. 특히 그 영역에서 자신이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을 때(혹은 그렇게 느낄 때) 이런 편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죠. 우리는 흔히 "예쁜 사람은 자신보다 외모가 덜한 사람과 함께 다닌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사회적 비교 편향을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겠죠.



스테판 가르시아(Stephen M. Garcia) 등의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사회적 비교 편향이 같이 일할 사람을 선택할 때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규명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하버드 법대 교수가 되어 두 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을 교수로 채용하는 상황을 가정하게 했습니다. 참가자 중 절반에게는 법학 분야의 최고 저널에 25편의 논문을 게재한 교수로, 나머지 절반에겐 지금까지 발표한 논문이 총 95편인 교수라고 상상케 했죠. 다시 말해, 첫 번째 그룹은 논문의 질이 법대 내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의 입장이, 두 번째 그룹은 논문의 양이 다른 어떤 교수들보다 많은 교수의 입장이 된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두 명의 가장 지원자 중 한 명을 신규 임용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존스라고 불린 교수는 총 75편의 논문을 썼고 최고 저널에 30편을 게재한 경력이 있고, 스미스 교수는 총 100편의 논문 중 20편을 최고 저널에 실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존스와 스미스 중에 누구를 추천했을까요? 논문의 질이 우수하다고 '프라이밍'된 참가자들 중 69%가 논문의 양이 많은 스미스를 선택했습니다. 반면, 논문의 양이 많다고 가정된 참가자들 중 31%만이 스미스를 선택했죠. 즉, 논문이 질이 우수한 사람은 논문의 양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고, 반대로 논문의 양이 우수한 사람은 논문의 질이 우수한 사람을 선호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강점을 능가하는 사람을 은연 중 배제하려는 사회적 비교 편향이 뚜렷하게 나타난 결과죠.

가르시아는 이런 현상이 가상의 상황이 아니라 실제에서도 발생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후속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어휘와 수학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을 본 후에 그 결과를 피드백 받았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실제 점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어휘와 수학 실력이 각각 상위 18%-상위 32%, 상위 32%-상위 18%인 두 가지 결과만을 피드백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어휘 실력이 뛰어나다는 피드백이었고, 두 번째 경우는 상대적으로 수학 실력이 뛰어나다는 피드백이었죠.

그런 다음,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자신과 같이 과제를 수행할 팀원을 직접 골라보라며 두 명의 정보를 제시했습니다. 존 하디라 불린 학생은 어휘와 수학 실력이 상위 5%-36%였고, 스콧 워커란 학생은 각각 상위 35%-상위 6% 였죠. 실험 결과, 자신의 어휘 실력이 뛰어나다는 피드백을 받은 참가자들 중 74%가 스콧 워커를 선택했고, 수학 실력이 뛰어나다는 피드백을 받은 참가자들 중 62%가 존 하디를 선호했습니다. 이 결과 역시 자신의 강점 영역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사람을 덜 선호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회적 비교 편향의 근원은 자존감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있다는 점은 대학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또다른 실험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높은 연봉을 받는 위치에 있다고 프라이밍된 참가자들은 자신보다 높은 연봉을 받게 될 지원자를 덜 선호했고, 조직 내에서 의사결정 권한이 가장 강하다고 프라이밍된 참가자들은 자신을 능가하는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지원자를 역시 덜 선호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자존감에 있어 높은 연봉과 강력한 의사결정이 각자에게 중요하다고 여긴 까닭이었습니다.

가르시아의 연구는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채용 관행에 매우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흔히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뽑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위 실험에서 봤듯이, 특정 영역에서 실력이 보통인 사람들보다는 높은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적 비교 편향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뛰어난 인재를 보유한 조직이 바로 그 뛰어난 직원의 존재로 인해 더 뛰어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고 결국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지 모른다고 추론케 합니다. 

일반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사람을 알아볼 능력이 있기에 오히려 뛰어난 사람을 배제하는 역효과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비교 편향에 의해 우수한 지원자를 배제할 위험을 줄이려면, 지원자에게 요구되는 영역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기존 직원을 채용 심사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조치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조직이 새로운 우수인력을 수혈하여 보다 높은 위치로 도약하길 원한다면 말입니다.


(*참고논문)
Tainted recommendations: The social comparison b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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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업에서 직원들의 성과 향상을 꾀하고 그 업적을 인정할 목적으로 '이 달의 우수사원'과 같은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수사원으로 뽑힌 직원에게는 명예 뿐만 아니라 금전적 혹은 비금전적 부상을 함께 수여하기도 하죠. 여러분은 이 제도가 얼마나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상의 도입으로 직원들이 '나도 한번 받아보자'라며 의욕을 불태우던가요, 아니면 '어차피 받을 사람만 받을 텐데 뭐하러 애 쓰냐'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가요?

웨스턴 미시건 대학의 더글러스 존슨(Douglas A. Johnson)과 앨리스 디킨슨(Alyce M. Dickinson)은 6명의 학생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은행의 수표처리자 역할을 부여하고 각자 분리된 장소에 놓여진 컴퓨터 앞에 앉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모니터 상에 나타나는 10달러에서 999.99달러에 이르는 수표 정보를 보고 그 내용을 화면 아래쪽에 위치한 박스에 입력해야 했습니다. 헌데 학생들이 실험을 위해 사용한 컴퓨터에는 프리셀, 지뢰찾기 등과 같은 게임 프로그램 6종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표 정보를 입력하다가 윈도우를 최소화시켜 놓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게임을 즐길 수 있었죠.



학생들은 10주 동안 1주일에 한번 연구실로 찾아와 45분간 실험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매주 5.25달러를 받기로 했습니다.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1주일 동안 입력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건을 헤아리고 20명의 다른 참여자(가상의 참여자)와 실적을 비교하여 1위를 차지한 사람에게 '이 주의 수표처리자' 상을 수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주의 수표처리자'상은 여러 번 받을 수 없고 오직 한 번만 주어진다고 했죠. 하지만 이 상을 받는다 해도 수고료 이외에 추가적인 금전적 보상은 없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상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실적 변화를 측정하려는 의도로 6명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수표 처리 실적과 상관없이 한번씩 '이 주의 수표처리자'상을 수여했습니다. 실험 결과, 상을 받은 후에 실적이 향상되는 모습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고 오히려 몇몇 참여자들은 상을 받은 후에 실적이 급감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는 '이 달의 우수사원' 제도가 상을 받은 직원에게 더욱 성과를 향상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어차피 한번 밖에 상을 받지 못하니까 상을 받고 나서 성과 향상에 박차를 가할 이유를 찾지 못한 까닭이겠죠. 실제로 많은 기업에서 동일한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번 상을 받지 못하도록 제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달의 우수사원' 제도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과 창출의 의욕을 꺾는 부작용을 일으키리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돌아가며 상 타기' 규칙을 없애고 금전적인 보상을 주기로 약속하면 결과가 달라질까요? 연구자들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후속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실험과 동일하게 몇 주를 진행하다가 학생들에게 1주일 간 가장 실적이 좋은 참여자에게 '이 주의 수표처리자' 상과 함께 50달러의 부상을 수여하겠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학생들은 바뀐 방식에 의해 실적이 뛰어나기만 하면 상을 여러 번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연구자들은 각 학생들에게 20명의 참여자 중 2~5위에 해당하는 실적을 기록했다고 거짓으로 알려줬습니다.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상을 받지 못하도록 조작했던 겁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겠죠(실험 후에 이 사실을 디브리핑(debriefing)할 때 학생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

개선된 '이 주의 수표처리자'상을 주겠다고 말한 이후, 몇몇 학생의 실적은 향상되긴 했지만 그 상승폭이 아주 작았습니다. 어떤 학생의 실적은 크게 상승하다가 다시 크게 떨어지는 패턴을 보이기도 했죠. 이로써 금전적인 보상을 준다고 약속하고 한번 이상 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이 달의 우수사원' 상은 성과 창출 의욕을 유지시키거나 높이는 데에 효과가 없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주에도 상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까닭이겠죠. 그렇다면 '이 달의 우수사원'은 상이 아니라 '내 성과는 인정 받지 못하는구나'라는 열등감에 빠뜨리는 벌이기도 한 셈입니다.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이 달의 우수사원' 제도는 승자가 아닌 사람들을 모두 '루저'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죠. 연구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눌러야 내가 올라간다'는 이 제도의 구조가 다른 직원의 성과 창출 행위를 은연 중에 방해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사보타주(sabotage)의 동기를 자극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성과 창출의 과정이 어땠는지는 전혀 따지지 않고 오직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로만 승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조직 전체의 성과에 나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전혀 우수하지 않은 사원에게 '이 달의 우수사원' 상을 수여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지죠. 아마 이런 '유명무실 현상' 때문에 이 제도를 폐지한 회사도 많을 겁니다.

상을 주면 성과가 올라간다는 발상은 '완전히 오류다'라는 사실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유도할 때마다 '상을 주자'란 아이디어가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사실입니다. 상이 반짝효과를 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식경영을 활성화할 생각으로 소위 '지식 마일리지'를 통해 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데이터베이스에 '쓰레기 정보'만 넘쳐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죠.

직원들의 성과를 높이려면 '이 달의 우수사원'이라는 안일한 아이디어보다는 성과 창출 과정을 끊임없이 피드백하고 지원하는 것이 먼저이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번 달에는 누가 '이 달의 우수사원'으로 뽑혔습니까? 그 사람이 진짜 우수사원입니까? 여러분이 우수사원으로 뽑혔다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No'라고 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Employee-of-the-Month Programs: Do They Really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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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기업들이 운영 중인 성과급을 살펴보면, 회사나 팀의 성과에 따라 지급하는 '그룹 성과급'과,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기초하여 지급하는 '개인 성과급'이 섞인 형태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는 회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이렇게 두 가지 형태의 성과급을 섞어서 적용하는 이유를 파고 들어가면, 그룹 성과급만을 지급할 경우 그룹의 성과에 무임승차하려는 직원이 생길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단위로 성과를 측정해서 성과급을 주어야만 직원들의 동기를 높일 수 있고 '농땡이'치는 직원들을 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개인 성과급의 적용이 무임승차자를 줄이는 이득이 있다고 인정해 보죠. 하지만 그 이득을 얻기 위해 드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경험적으로 항상 느끼고 있겠지만, 제도는 항상 트레이드-오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비용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크리스토퍼 반스(Christopher M. Barnes)와 그의 동료들은 그룹 성과급과 개인 성과급을 섞어서 적용할 때와 그룹 성과급만을 적용할 때 팀의 성과와 구성원 개인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질지 실험을 통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경영학과 학부생 304명을 모아서 4명씩 한 팀을 이루게 했습니다. 4명의 팀원들은 한 방에 모여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한 적을 인식하여 가능한 한 빨리 적들을 섬멸해야 하는 일종의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함께 수행해야 했습니다. 팀원들은 자신만의 PC 앞에 앉아 게임을 진행했지만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공동의 적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의논할 수 있었죠.

연구자들은 학생들 중 절반(38개팀)에게는 무작위로 선정한 라이벌 팀의 점수보다 높게 나올 경우 팀원 각자에게 10달러의 상금을 줄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룹 성과급을 적용한 셈이었죠. 반면 나머지 팀의 학생들에게는 그룹 성과급과 개인 성과급을 섞어서 지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팀의 점수가 라이벌 팀의 것보다 높으면 각자 5달러씩 받을 수 있고, 팀원 개인이 다른 팀의 특정 팀원보다 높은 점수를 받으면 개인에게 5달러를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게임을 수행하도록 한 결과, 그룹 성과급과 개인 성과급을 섞어서 받기로 한 팀의 학생들이 점수 쌓기에 열을 올렸고 몰려오는 적들을 더욱 빠르게 물리치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팀의 학생들은 자기네 편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4명의 팀원들이 한 방에서 게임을 진행했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격 방법을 결정하고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의사소통의 질이 높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의 특성상 다른 팀원들보다 적들의 공격을 더 많이 받는 바람에 버거워하는 팀원이 있었는데, 그룹 성과급만을 약속 받은 팀들이 혼합된 성과급을 받기로 한 팀들보다 서로 도와주는 행동이 더 많이 나타났습니다. 바꿔 해석하면, 개인 성과급이 적용된 팀들이 상대적으로 비협조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개인 성과급의 존재가 개인의 이득을 최대화하려는 욕구와 팀의 성과에 기여하고자 하는 이타심 사이의 '내적 갈등'이 정보 흐름의 단절과 비협조를 유도했던 겁니다. 또한 자기 혼자 다른 팀원을 도와주는 등 이타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다른 팀원들로 인해 자기가 피해(개인 성과급을 못 받는)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다른 팀원들도 나처럼 이기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거야'란 인식도 은연 중에 작용했겠죠.

개인 성과급이 적용되면 팀원들 간에 활발히 일어나야 할 의사소통이 저하되고 협조적인 모습이 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기업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팀에 투영하기는 어렵겠죠. 반스가 논문에서 언급했듯이, 이 실험의 결과는 적을 물리쳐야 하는 컴퓨터 게임으로 얻어진 것이기에 일상적인 운영 업무를 주로 하는 팀보다는 특정 주제로 프로젝트를 구성해 긴급히 해법을 마련해야 하는 '태스크 포스(Task-force)형' 팀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허나 점점 더 많은 팀들이 태스크 포스형 팀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스의 실험을 글자 그대로의 태스크 포스팀에만 적용된다고 제쳐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룹 성과급도 주고 개인 성과급도 주면 성과가 더욱 높아지리라는 기대는 근거가 없을뿐더러 매우 순진한 생각입니다. 팀원들이 합심하여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고 회사 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기업환경의 변화와 개인 성과급의 적용은 시너지를 일으키기는커녕 정보의 원활한 흐름을 막고 협조적인 분위기를 깨뜨릴지 모릅니다. 

모든 제도는 트레이드 오프가 있습니다. 제도를 도입할 때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고 있고 베스트 프랙티스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무엇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참고 논문)
Mixing Individual Incentives and Group Incentives: Best of Both Worlds or Social Dile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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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린 포스팅 중에 '능력 없는 직원들이 더 많이 착각한다'란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데도 자신이 평균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고 인식한다는 실험 증거를 들며 '자기평가(Self-Assessment)'의 무용함을 지적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확장하여 자기평가의 결과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닻 효과(Anchoring Effect)'을 일으킴으로써 평가자들로 하여금 피평가자의 진정한 역량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자기평가의 무용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닻 효과'란 사전에 노출된 정보에 의해 의사결정의 결과가 영향을 받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행동경제학의 선구자인 대니얼 카네만과 아모츠 트버스키가 수행한 실험을 통해 유명해진 개념이죠. 피실험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 중 유엔(UN) 가입국은 몇 퍼센트일지를 맞혀보라고 질문을 던지기 전에 룰렛에 나온 수를 보여주면, 피실험자들이 어림짐작으로 내놓은 답은 룰렛 수에 근접해집니다. 피실험자들은 룰렛에 나온 숫자가 10이면 25%로, 룰렛 수가 65이면 45%로 답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의 유엔 가입률과 아무 상관 없는 숫자가 피실험자들의 판단이 멀리 가지 못하도록 닻이 됐던 겁니다.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의 제 첸(Zhe Chen)과 사이먼 켐프(Simon Kemp)는 승진심사를 할 때 지원자들의 자기평가 결과가 평가자들의 판단을 잡아두는 닻이 됨을 실험을 통해 규명했습니다. 그들은 학부생 80명을 모집하여 무작위로 네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승진을 원하는 가상의 대학 강사가 제출한 2~3페이지짜리 지원서를 읽고 그 사람의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학과장의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지원서는 크게 지원자 신상정보, 강의 경력 및 연구 성과, 자기평가로 구분되었는데, 자기평가 부분에는 지원자가 스스로 자신의 강의 능력, 연구 성과, 기여도를 10단계로 평가한 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첸과 켐프는 지원자의 '강의 경력 및 연구 성과'를 '좋다', '별로다'의 2가지 경우로 조작하고, 자기평가 결과를 '높다', '낮다'의 2가지 경우로 꾸밈으로써 모두 4가지 종류의 지원서를 만들어 각 그룹의 학생들에게 하나씩 배포했습니다. 그런 다음, 지원자의 자기평가 표와 동일한 포맷의 표에 평가 점수를 기입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좋다-높다'라고 조작된 지원서를 읽은 학생들은 평균 8.8점(10점 만점)이라고 평가한 반면, '별로다-낮다'란 지원서를 본 학생들의 답은 6.8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원자가 자기평가를 어떻게 했든 지원자의 강의 경력과 연구성과를 보고 평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2점이라는 차이는 평가자의 평가가 지원자의 자기평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걸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첸과 켐프는 이와 같은 닻 효과가 평가 초보자인 학생들 때문에 나타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성을 갖춘 교수들을 차출하여 평가자의 역할을 맡겼습니다. 교수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자기평가 결과가 '높다'인 지원서와 '낮다'인 지원서를 검토한 후 평가하도록 하니, 이번에도 닻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지원자의 자기평가 점수가 높은 지원서를 본 교수들은 평균 6.4점으로, 자기평가 점수가 낮은 지원서를 검토한 교수들은 평균 4.7점으로 평가했던 겁니다. 전문성이 닻 효과를 줄이지 못한다는 걸 증명한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수들이 초보자인 학생들에 비해 지원자에게 박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전문성이 높을수록 상대방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런 냉정한 판단 기준은 지원자의 자기평가가 유도하는 닻 효과 앞에서 무력해졌습니다. 교수들도 지원자의 강의 및 연구 성과보다는 자기평가 점수에 끌어당겨지고 말았습니다.

지원자가 1명이 아니라 2명이면 닻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첸과 켐프는 지원자별로 4가지 종류의 지원서(강의/연구성과와 자기평가가 각각 '좋다-높다', '좋다-낮다', '별로다-높다', '별로다-낮다')를 만든 다음, 두 지원자의 지원서를 짝을 지어 네 그룹의 평가자들에게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이때에도 역시 닻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평가자들이 전체적으로 강의 및 연구 성과가 좋은 지원자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원자의 자기평가가 평가 결과를 좌우했습니다. '별로다-높다'인 지원자(7.3점)가 '좋다-낮다'인 지원자 만큼(7.5점)의 점수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일련의 실험으로 증명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원자가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측정한 자기평가 점수가 평가자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평가 관행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줍니다. 평가제도를 설계할 때 평가자가 피평가자의 자기평가 결과를 참조해야 하는지의 여부, 2차평가자가 1차평가자의 평가를 열람해야 하는지의 여부, 점수로 자기평가를 내려야 하는지의 여부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첸과 켐프의 실험은 확실한 결론을 내리도록 해 줍니다. 점수로 쓰인 자기평가 결과는 무용하거니와 평가자에 의해 참조될 경우 평가 결과를 왜곡시키고 맙니다. 평가자가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비교가 가능한 다른 피평가자가 있다 하더라도 닻 효과는 떨어질 줄 모릅니다. 자기평가 점수를 평가 점수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평가 결과를 참조(혹은 열람)하도록 하면 결국 자기평가 점수는 최종 평가 점수에 반영되는 꼴입니다.

자기평가를 수행하는 조직에서는 지금부터라도 닻 효과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여러 평가(승진, 인사, 채용 등) 프로세스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가 지표를 만드는 지난한 과정보다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참고논문)
Self-Assessments Produce Anchoring Effects in Promotion Decisions
Anchoring effects on performance judg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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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러분이 사는 마을에 정부 관리가 찾아와 중저준위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을 위한 설문조사를 벌인다면, 여러분은 그 계획에 동의하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각자가 처한 상황, 가치관, 방사능에 대한 생각 등에 따라 의견이 갈릴 겁니다. 어떤 이는 님비(NIMBY)를 외치며 강하게 반대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공공 서비스(전력)를 이용하는 시민의 의무라는 생각에 찬성 의사를 보이기도 할 겁니다. 헌데 정부 측에서 폐기물 저장소를 짓는 것에 대해 주민들에게 보상을 한다고 제안하면 어떻게 될까요? 최초의 찬성률이 높아질까요, 아니면 낮아질까요?

1993년에 스위스 정부는 울펜쉬에센(Wolfenschiessen) 지역을 중저준위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의 후보지 중 한 곳으로 선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지역은 스위스 중부에 위치해 있고 640가구에 2,100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은 주민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스위스 당국은 최종 선정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런데 브루노 프레이(Bruno S. Frey)와 펠릭스 오베르홀쩌-기(Felix Oberholzer-Gee)는 후보지 선정 발표가 있기 6개월 전, 울펜쉬에센 지역의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305명을 만나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각각 1시간씩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국민투표에서 찬성과 반대 중 어느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까'라고 주민들에게 질문을 던지자 주민들 중 50.8%가 찬성 입장을 보였습니다. 스위스는 시민의 의무를 중요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찬성 의견이 나온 것이라 짐작됩니다. 프레이 등은 스위스 정부가 주민들에게 저장소가 운영되는 기간 동안 매년 일정 금액을 보상금을 지급한다면 찬성률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싶었습니다. 매년 2,175달러를 지급하면 찬성하겠냐고 질문하자 주민들의 찬성률은 24.6퍼센트로 뚝 떨어졌습니다. 보상이 없을 때에 비해 반이나 찬성률이 줄어든 겁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이상한 현상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서는 시민의 의무를 이행한다고 느끼는 주민들의 가치에 보상이 더해지면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와 같은 혐오시설을 더 기꺼이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즉,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면 그만큼 선호도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보상금액이 적기 때문이었을까요?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2배 높여서 매년 4,350달러면 어떻겠냐고 질문했지만 찬성률은 변하지 않았고, 최초 제안금액의 3배인 매년 6,525달러를 제안해도 주민들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보상금액의 증가는 찬성률 증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민들은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면 그때부터 머리 속에 계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상금 이야기가 없을 때는 혐오시설에 대한 호오 여부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각자 따져 답변하지만, 보상금이 제시되면 혐오시설이 마을에 들어옴으로써 자신이 겪을 불쾌함을 가늠하고 보상금액이 과연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가를 계산하게 됩니다. 저장소 건설에 찬성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가 돈이라는 이기심으로 치환되어 그만한 보상금으로는 불쾌함을 감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습니다. 이때문에 보상금 제안이 오히려 찬성률을 떨어뜨리고 보상금을 올려 준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죠.

이 사례는 지난 번에 포스팅한 '탁아소 벌금 사례'와 동일한 맥락을 갖습니다. 사회적 책무나 도리에 의해 원활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돈이 개입되면, 시장규범이 사회규범을 압도해 버리고 오히려 원치 않는 반대의 상황이 강화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가 늘어나면 그 행동이 더 강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더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돈이라면 행동을 약화시키는 강력한 동기가 발생하고 만다는 교훈을 이 사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헌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프레이와 올베르홀쩌-기가 울펜쉬에센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1년이 지난 후, 주민들 중 5분의 3은 스위스 정부가 40년 간 매년 가구당 4,687달러를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수용하고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에 찬성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1년 전, 설문조사를 벌일 때는 보상 금액을 높여도 한번 낮아진 찬성률이 올라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프레이와 오베르홀쩌-기는 이런 현상을 소설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가 쓴 '노부인의 방문(The Visit of the Old Lady)'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부인은 어느 날 중부 유럽에 있는 귈렌이란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 그곳에서 살며 알프레드 일(Alfred Ill)이란 남자와 사귀다가 임신까지 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알프레드는 아버지 노릇을 요구하던 그녀를 거부했고 증인들을 매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침하게 됐다며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녀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마을을 떠났고 여러 곳에서 창녀 생활을 전전하다가 운 좋게 아르메니아의 석유 재벌과 결혼했고, 남편의 사망으로 엄청난 부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 마을을 찾은 이유는 알프레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알프레드를 죽여 준다면 마을에 5억 파운드를 기부하고 마을 사람들 각자에게는 5억 파운드를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것이었죠. 이 제안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알프레드는 그 마을의 학교 이사장으로서 꽤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죽여 달라는 그녀의 비도덕적인 제안은 아무리 큰 보상금을 준다 해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불길한 제안을 받은 이유에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10억 파운드가 자기네 돈이 된 양 비싼 물건을 구입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죠. 심지어 알프레드가 운영하는 상점에 들러 돈을 써댔습니다. 호화로움은 공짜가 아닌 법, 마을 사람들 각자 상당한 빚을 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알프레드를 옹호하던 분위기는 적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알프레드는 누군가에게 목 졸라 살해 당하고 맙니다. 사람들은 알프레드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라며 사건을 은폐해 버리고 그녀가 건네 주는 거액의 수표에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암울한 불안감과 자책감이 마을 사람들을 감싸며 이야기가 끝납니다. 

울펜쉬에센 주민들은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 후보지로 선정된 후에 정부의 보상계획을 접했을 겁니다. 프레이와 오베르홀쩌-기가 논문에서 자세하고 확실한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정부의 건설계획이 발표된 후에 주민들의 소비 행태가 변한다는 정황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저장소가 건설되면 근로자들이 거주하게 될 터이니 집을 증축할 계획이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개발계획으로 인한 보상금을 미래의 확실시되는 소득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울펜쉬에센 사례는 이렇게 이중적인 시사점을 우리에게 줍니다. 보상금이 시민의 의무를 대체하여 찬성율을 떨어뜨렸다는 것, (비록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보상금의 존재가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상을 도입하여 구성원들의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촉진시키려 할 때 이 사례가 주는 시사점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이 글은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 건설에 대한 글쓴이 개인의 찬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참고 논문)
The Old Lady Visits Your Backyard: A Tale of Morals and Mark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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